수난시대

지금 일고 있는걸그때더 일았더라도 2.

by 밤호수

“여보.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겸손한 사람인 줄 알았어. ​

그런데 지금 보니 난 그냥 '겸손한 척'하던 사람이었어. ​

여기에 와 보니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니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나니

내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아. “

어느 날엔가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나서야

그도.

나도.

우리가 몹시도 '교만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단지 '겸손한 척'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인 것을.



롱아일랜드 카운티병원의 기숙사.

무너질듯하던 C1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던 D4로 이사를 한 후.

우리도 미국 생활에 서서히 적응을 해 나갔다.

아니.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매일매일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군인의 심정이었다고 훗날 말했으니.

미국에서

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사람이

의사가 되는 길은

‘미국의사고시 usmle’ (당시 모두 4차)를 통과한 후,

레지던트를 마치면 된다.

레지던트를 하면 그 이후에는 많은 기회가 열린다고 느끼지만, 정작 '레지던트'가 되기도 어렵고 그 시절을 통과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이민자 의사들이 레지던트를 하기 위해 뉴욕과 같은 대도시로 몰린다. 대도시의 바쁘고, 힘들고, 어려운 병원. 미국 의대졸업생들이 기피하는 병원에서 이민자들을 많이 뽑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에 따라 롱아일랜드의 시립병원으로 입성한 것이었다. 그곳은 인도 파키스탄 네팔 출신들이 많았고, 중국이나 한국 등 이민자 레지던트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역으로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의사들이

남편같은 '아시아권 의사'를

(게다가 '영어도 못하는!')을 무시하고

인종차별하기가 일쑤였다.

남편도 인도사람인 윗사람에게

3년간 심각한 인종차별을 당했다.

그럼에도 당시 우리에겐

미국에 입성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병원은 감사한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레지던트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인턴 - 레지던트 - 공중보건의'까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와서 다시 시작된 레지던트 생활.

(평생 남편이 레지던트만 할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응급실 30시간 근무.

아침 7시경 출근을 하면 다음 날 12시가 넘어서

초죽음이 되어 나타나곤 하던 남편.

그래도 거칠고 험악한 뉴욕 흑인 알콜중독. 노숙자들에게 빡세게 하드트레이닝을 받아서 그때부터 이미 흑인영어. 슬랭 등에 익숙해졌다고 우리는 지금도 말하며 웃곤 한다. (그건 사실이다.)


진짜 문제는 응급실 이후 터졌다.

응급실 근무 이후, 이어진 내과 병동 근무.

오랜만에 일반내과 근무를 해보는 남편은

첫날부터 기합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신과를 한 탓에 주사 한번 안 놓아본 지

무려 인턴 이후 8년여가 지났으니!​

갑자기 병동에 투입되어 환자에게 주사 놓기 하나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혈관을 잡는 게 미숙했던 그는,

환자에게 실수를 할 수는 없으니

대신 주사바늘을 집에 가져와서 밤에 나를 대상으로 연습을 했다. ​ 세상에서 주사맞기가 애기 낳기보다 싫다던 나였지만, 별 수 있겠는가. 일단 남편은 살리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는 내 손목을 남편 앞에 무기력하게 내주었다.​


(나는 그 때 임신중이었다.

첫째가 세살이 넘어가고 있어서

터울이 더 지면 안된다는 불안함에,

계획을 해서 간신히 가진 둘째였다.

그 기숙사에서. 그 상황에 둘째라니.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절레절레 돌리게 된다. )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서도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남편의 고질병이었던

디스크가 도져서

결국 내과 시작 몇주만에

아무것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은 완전 좌절하여,

모든 의욕은 꺾였고,

푸르렀던 꿈은 그저 새까맣게 보였다.

​​

"여보.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가야겠어."

청천벽력같던 소리. ​

미국에 온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란 말이던가.

내가 이렇게 돌아가려고 이고생을 하고 왔단 말인가.

하지만, 막상 허리병으로 근무를 할 수 없게 된 남편은 이 바빠고 살벌한 병원에서 누구하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고 느꼈다. 돌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그러나 그 때.

남편을 뽑아준 유대인 의사 DR. Sperber가

또다시 그를 도왔다.

"닥터홍. 우울할 때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말게.

아무런 결정도 우울할 땐 하는게 아니야.

모든 결정은 뒤로 미루게.

그 때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내가 이해하겠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남편에게 유급 휴가를 한달 주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이 바쁜 도심 한가운데의 병원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긴 유급휴가를 받지 못했다.

홀로코스트의 오랜 상흔을 간직한 Dr. Sperber의 가족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남편의 아버지.

그 이야기의 인연으로 첫 만남에 남편을 뽑아준 Dr. Sperber는 다시금 그렇게 우리를 도왔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한다.

그는 진정.

주님이 우리에게 대신 보내주신 천사였다고.

한달동안 허리와 정신을 회복한 남편은

다시 정신무장을 하고,

머리를 빡빡 밀고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

한달 후 병원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언어와 문화 모두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



그러던 어느 날,

역시 내과 근무중이던 때의 아침.

출근준비를 하고 나가려던 남편이

갑자기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는 것이었다.

비위가 약하다든가,

체하는 걸 생전 가야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보, 괜찮아?"

얼굴이 파래져서 나온 그는 괜찮다며 출근을 했다.

그날 밤 늦게 돌아와서도,

다음날 아침에도

그는 계속해서 구토를 했다.

구역질이었는지, 구토였는지 아무튼 괴로워했다.

표시는 안냈지만, 나는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혹시 큰 병은 아닌가 싶고, 저러고서도 꾸역꾸역 출근을 하는 그가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인가가 흘렀다.

그리고 어느날. 모처럼 밝은 얼굴로 퇴근한 남편이 기쁘게 이야기했다.

"여보! 나 괜찮아!"

"응? 이제 토 안해?"

"응!"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기가 막혔다. ​

지난 주.

내과 근무중 어떤 환자가 입원을 했는데

남편이 주사를 놓느라 혈관을 찾다가,

자기의 손가락을 찌른 것이었다.

아. 결국. 미숙한 주사놓기 실력이 부른 화근이었다. (무려 임신한 와이프를 대상으로 연습을 했음에도!)

그 환자는 에이즈 의심 환자여서

에이즈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따라서 환자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에이즈든 아니든) 남편도 에이즈 예방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이 몹시 독하여 구토증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

당시 임신중이던 나에게 걱정할까봐 자조치종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남편은 날마다 홀로 불안함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환자의 검사결과가 에이즈 음성으로 나왔음을

확인한 날.

비로소 걱정에서 해방된 남편은

그토록 기뻐하며 돌아왔다.

홀로 겪었을 그 일주일의 마음고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나는

기쁨보다는 그저 망연자실했다.

뒤로는 황량한 폐건물. 가을이 깊어가던 병원 기숙사 부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