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빨래. 기억.

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도 3.

by 밤호수


미국에 살고 있던 언니가 가끔 오면

그곳을 ghetto라고 했다.

때론 '엄마아빠 의사인 애들 노는데 맞아?' 라고도 했다.

엄마나 아빠가 의사라면 그래도 어느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텐데 애들을 이런데에 이렇게 방치?해 놓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숙사 앞 공터의 황량함과 황폐함은 그런 소리가 나오고도 남았다. 병원에서 심각하게 관리를 안해두고 거기다 부모들이 너무 바빠서(양 부모가 함께 레지던트를 하는 집이 많았다)

아이들은 그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베이비시터들의 무관심한 시선 하에 낡디낡은 장난감 미끄럼틀에서 위태위태하게 놀고 있기 일쑤였으니.


그나마 나는 그 시절.

일이 없었기에 아이와 늘 함께 있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남편이 근무했던,

그리고 우리가 살던 병원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롱아일랜드에서 보기 드물게

바쁘고 스산했으며,

바로 옆에는 교도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소방서와 경찰서도 있었다.

또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소년원이 있었다.


그런 탓에,

사는 사람은 음산하게 느꼈지만,

치안면에 있어서는 안전했다.

어짜피 병원은 '사는 사람'을 위한 곳은 아니니.

그럼에도 한밤중에 총을 쏘는 소리가 들린 적도 두어번 있었다. 그런 날엔 다음 날 어김없이 어떤어떤 사건이 있었더라~ 하고 남편이 말해주곤 했다. (치정. 폭행 등 다양했다.)


병원 부지가 따로 있고,

바로 병원에 붙어있는 기숙사 부지가

3층짜리 네 개의 건물이 'ㅁ'자형태로 있었다.

그리고 그 'ㅁ'자의 안이

아이들이 주로 노는 공터였기에

많은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면

그 안에서 자전거도 타고,

나무와 흙 사이에서 소꿉놀이도 하곤 했다.


황량하고 뭐 하나 좋을 것 없는 부지였으나,

그곳에서 참 아이와 많은 추억을 쌓았다.

참 많이도 그 길을 걸어다녔다.

울고 떼쓰는 아이때문에 한숨을 쉬던 곳도 그 공터였고,

다람쥐를 준다고 도토리를 모으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소짓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안그래도 황량한 공터는

내 가슴마저 싸늘해질 정도로 춥고 휑뎅그래했다.

‘ㅁ'자를 만드는 네 개의 건물 사이사이로

차가운 뉴욕의 바람이 들이치고,

아이들이 그나마 갖고 놀던

흙때가 가득 묻은 미끄럼틀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렸다.


왜였을까.

그곳에서 느낀 겨울은 한국의 겨울보다

더 춥고 황량했다.




그 계절.

내가 가장 싫어하던 일은 역시 '빨래하기'였다.


가을까지는 그나마 견딜만 했던 빨래방 가기는 겨울이 오면 정말 너무 힘들고 하기 싫었다. 옷은 더 두꺼워졌고, 아이를 데리고 가서 몇 시간 기다리기도 힘들었고, 또 건조를 마쳐서 부피가 늘어난 옷을 다시 들고 와도, 주차를 먼 곳에 하고 집까지 와야 했기에, 손목이 빠질 듯 아팠다.


자주 가야,

그나마 가볍게 할 수 있건만

그게 너무 싫어서

버티고 버티다가

한껐 무거워진 빨래더미를 잔뜩 이고 빨래방에 갔다.

아이를 놓고 갈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틈을 타서

가곤 했다.


그 날도 바람이 몰아치던 12월의 어느 밤이었다.

바람이 불면 유난히 커다란 창문으로

‘휑~'소리가 크게 들리던 기숙사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엔 3층엔 비가 새서 양동이, 2층엔 3층의 에어컨이 새서 양동이를 받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겨울에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히터도 빵빵하게 나왔다.

백년쯤은 에어컨 청소를 안한 듯 한 게 걱정도 되지만, 뭐 당장 그런것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고 살겠는가. 우리의 기숙사 거실에는 작은 트리마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가 토마스 기차에 빠져 있었을 때라,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토마스도 크리스마스 이야기였다.


거기에 토요일 밤이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쉴 수 있던 그 시간.

남편이 있는 그 틈을 타서 나는 빨래를 하러 나섰다.

집에서 바로 건너편이었지만, 걸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차로 가서 빨래를 넣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가서 건조기에 넣어놓고, 또 한시간반쯤 있다가 건조기에 있는 빨래를 수거해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왜이렇게 지치고 바람은 차게 느껴졌는지,

양손 가득 다 된 빨래를 이고 돌아오는 길이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아니, 괜시리 설움이 폭발했다.

기숙사 뒤편에 차를 세우고 잔뜩 부피가 늘어난 빨래를 쓰레기봉지 세개쯤 가득 담아서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바람을 피할 수 없었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쓰레기봉투 손잡이가 늘어나서 베기고 아팠다. 바람에 손이 시렸다.


멀지 않은 그 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왜그리 고단했는지,

더 고단한 건 몸보다 마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몇 번을 왔다갔다 하는동안

어떻게

남편은 자기가 한단 소리를 안할 수가 있지?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여기 와서 누구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거지?'


불만은 불만을 타고

마음 깊숙이 갖은 생각이 꼬리를 물게 했다.

일주일에 딱 한번. 토요일 오후에 쉬는 남편이었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서

빨래를 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에 와서

이 세탁기도 없는 낡아빠진 기숙사에 사는데.

누구때문에 이 무거운 빨래무더기를 옮기고 다니는데.

아무래도 앞으로는 이시간에

남편보고 직접 가서 빨래를 해오라고 해야겠어!’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사이로

그런 생각을 씩씩대며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집까지 오는 길이

나 스스로의 불만 때문인지 더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아주 무겁고 육중했던 우리 기숙사집 초록색 철문.

그 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2층 우리집이다.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빨래를 안으로 옮겼다.


"여보~~~~~~~~!!!!!"


한바탕

이 억울함과

이 분함과

이 분노를 쏟아부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이 빨래 노가다의 서러움을

제대로 폭발시킬 자세를 갖추고!


문을 연 순간.

바람에 언 나를 녹이는

따뜻한 집안의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언제나 어둡게만 느껴진

미국 집의 주황빛 간접조명이

그날 따라 따뜻하게 위에서 비췄다.


그리고

'엄마~~까르르르'

아빠와 함께 울고 웃고 떠드느라

행복이 넘치는

아이의 웃음소리.


'엄마~~~와쪄?'

위층 꼭대기에서 아이가 엄마를 반긴다.


집에는 토마스의 노래.

내가 좋아하는 토마스 ost

그 중에서도 'go fishing!'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도 이 노래들을 들으면 그 시절이 떠올라 아련해진다.


아.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행복이 나를 감쌌다.

일주일 내내 시달리다가

잠시의 휴식을 맛보고 있는 남편도.

아빠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이 달콤한 아이도.

차가운 뉴욕바람을 맞으며 빨래를 하고온 나도.


나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 느꼈다.

그리고 진정 따뜻한 마음으로

환히 웃으며

아이를 향해

남편을 향해

올라갔다.


"응. 엄마 왔어~~~~~~~~~

아가야~!

여보. 아이 보느라 고생했지?"





그 집. 기숙사 벽. 기차를 타고 하늘까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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