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도 4.
미국은 결단코 신분제 사회이다.
(비단 어떤 사회든 그렇지 아니하랴!)
피라미드의 위로부터
시민권자, 영주권자, 각종 비자,
그리고 불법체류자에 이르기까지
'성골, 진골, 육두품, ' 또는
‘브라만, 수드라, 불가촉천민'
그 신분에 의한 위계는 확실하고 공고하다.
쉽사리 바뀌지 않고,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십년쯤만 살다보면,
이 신분제의 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위치에 따른 삶의 편리함과 불편함.
차별과 아픔의 모습들도 보게 된다.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불법체류자'들.
그들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수없이 많은 비난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 있는 그들은 언제나 고단한 또 하나의 삶의 모습일 뿐이다.
또 하나의 고달픈 이웃일 뿐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불법체류자 신분인 적은 없었다.
비록 영주권을 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비자를 갱신할 때마다 불편함이 따랐으나
합법적인 신분으로 있었기에,
그렇게 억울할 일은 없었다.
영주권이 있었다면 물론
'자를테면 잘라봐라'라는 심정으로
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영주권을 따기까지는 늘 '을'은 우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분을 만드는 중요한 것은 바로 '영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언어는 권력이다.
이 사회에서 동양인이라는 타고난 인종적 위치 외에도
아직도 내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는 '영어'라는 권력을 제대로 습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노력이 그정도에 불과했기에,
이로 인한 차별과 약자가 되는 것에는 할 말이 없다.
좀 더 노력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면 나는 언어라는 권력은 적어도 차지했을 것이니.
남편의 초반 1~2년의 수난시대를 밑바닥에서 보내게 된 가장 큰 이유 또한 '영어'였다.
나이 서른이 되어, 남의 나라 병원에서
일해보겠다고 덤빈 자의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그는 그 '영어'라는 권력 앞에서
아주 처절히,
난도질당하듯 하루하루 느낄 수밖에 없었다.
"No.
Dr. Hong
That's not English!
Repeat after me"
이 말을 누가 했을까.
ESL 선생님이나, 적어도 동료의사가 했다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은 나쁠지언정
그래도 얌전히 따라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주인공은 환자였다.
그것도 지금 면담을 해야 하는 환자.
조울증 환자 면담 때였다.
안그래도 환자 면담이 쉽지도,
편하지도 않을 때였으니
천천히 나름대론 최선을 다해 질문을 했던 남편.
그 대답이
'닥터 홍.
당신이 하는 건 영어가 아니야.
나를 따라해 보시오.’
라니.
환자가 기분이 들떠서 (조증일 때였다.)
자기 딴에는 뭐라도 건설적인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발음을 교정해 주겠다,
선생님이 되어주겠다라고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 당시 남편은 첫째로 어이가 없었고,
둘째로는 속으로 '아. 저렇게 발음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겉으로 티를 낼 순 없으니 제법 심각하게 인터뷰를 이어갔으나, 이미 의사로서 체면이나 존중은 물건너 간 듯했다.
그 후에도,
남편은 '조증' 환자에게서 비슷한 일들을 겪었다.
다행이랄까 후에 환자의 조증이 가라앉으면 사과를 하는 환자도 있었지만, 조증 환자들의 넘치는 의욕은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후에는 '아. 내 영어를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이 환자는 조울증 증상이 있나보다'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2008년.
삼천포.
공중보건의사 시절.
우연하게 시작한 미국의사시험을 1차, 2차, 3차를 통과하면서 정말로 '미국에 가서 인터뷰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미국 LA에 가서 본 2차 임상시험은 정말 몇달동안 상황들을 달달달 외운 끝에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면접은 현실이지 않는가!
남편은 드디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말하기. 그리고 듣기.
입을 트게 하기 위해 '영어를 진짜 잘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런 제목의 레전드 책이 있다.)' 1권 2권을 사와서 '영어를 한국말로, 한국말을 영어로' 무한반복 연습을 했다. 그리고 skype로 미국선생님을 만나서 일주일에 한번씩 공부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를 떠나
몰몬교 선교사들과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삼천포와 같이 작은 동네에서는, 늘 까만 양복바지에, 하얀 셔츠, 까만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다니는 두 명의 몰몬교 청년 선교사들은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앳된 청년들. 미국의 유타주로부터 이 먼 곳의 나라. 작은 도시. 삼천포까지.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정적이고 금욕적으로 지낼까. 우리는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문화와 서로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가 미국으로 떠날때 그들은 진심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응원해주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음도 좋은 기회였으나, 무엇보다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뻤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그들을 이야기한다.
그런 과정이 다였다.
약 1년동안 나름대로 심화영어공부를 하였으나,
막상 미국에 와서 부딪힌 street 영어, 응급실 영어가 가당키나 했을까.
환자군은 다양했다.
homeless,
술에 취한 환자,
약물에 취한 환자,
우울한 환자 등.
응급실의 환자군은 그 증상도, 인종도, 발음도 다양했고, 그들의 영어에 귀가 뚫리기까지는 일정한 '절대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의료용어야 익숙하니 말이야 어떻게 한다 쳐도, 발음이 바르지 않았고, 리스닝은 또다른 문제였다. 그러니 다른 스텝들이 그 절대시간을 다 인내하며 기다려 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짜증을 냈고,
냉정했고,
위에 불만사항을 건의했다.
당연한 일이다.
일주일 내내 영어로 말을 하며 익숙해지다가도,
집에 와서 한 나절을 쉬는 토요일 오후가 지나가면 다시 혀가 굳고, 다시 귀가 막힌다는 게 남편의 이야기였다.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기가 죽은 상태로 오직 '귀가 뚫리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 지낼 때 즈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이라는 것을 받는 일이 생겼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