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와 소녀들.

8년간 기다려온 베이징 올림픽

by 밤호수

뱅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선명한 파란 의상에 금빛 메달을 목에 걸었던 2010년. 뱅쿠버보다 더 아름다운, 금메달 이상의 경기를 펼쳤던 2014년. 그녀를 보며 꿈을 꾼 건 비단 연아키즈들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연아키즈들이 그 날의 경기를 보며 나도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 역시 꿈을 꾸었다. 다시 한번 우리 나라에서 저런 선수들이 나오는 꿈을. 다시 한번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보며 가슴설레는 꿈을. 다시 한번 손에 땀을 쥐고 전 세계 쟁쟁한 나라의 선수들 사이에서 눈부신 경기를 펼치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그런 꿈을 꾸었다.


춤에는 1도 소질이 없지만 발레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 '꿈꾸는 발레리나 1, 2' 이런 소년소녀 명랑소설을 좋아했고 지금껏 내 책장에는 '스완'이라는 고전 중의 고전 만화책 스물 몇권이 꽂혀있다. 뉴저지 어느 만화대여점에 가서 사정사정을 하고 50불을 주고 업어온 나의 보물이다. 발레 의상 튜튜 하나만 그리는데도 몇 시간 걸렸을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림이 장면장면 가득하다. 보고 있으면 꿈을 꾸는 것 같다. 발레를 하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하고, 사랑을 하면 안된다는,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아픈 설정은 더더욱 발레라는 예술을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올려놓았다. 만화책에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실제로 보아도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발레리나들의 몸짓과 음악은 발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나의 마음이 피겨로 옮겨갔다. 마음을 홀린 것 같았다. 발레의 판타지를 사랑하던 나는 피겨를 보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의 소녀 때문이었다.전 국민의 마음을 뺏어간 이 소녀는 말도 많지 않고, 평소에는 표정의 변화도 많지 않지만 일단 작품에 들어가면 온 몸으로 음악을 타고 빙판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었다. 소녀가 일단 스케이트를 신으면 그냥 까만 아래위 연습복을 입고 화장도 하지 않았을지라도 빙판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 나오는 환상의 공간으로 바뀌고, 소녀의 손짓 하나하나에서 마치 만화처럼 색색의 반짝이들이 터진다. 작고 연약하지만 팔다리가 길고 쭉쭉 뻗은 소녀가 한쪽 다리를 들고 양손을 세상을 향해 펼치고 스파이럴 동작을 하면 가슴이 뭉클해져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인 '레미제라블'은 완벽한 안무와 음악과 올림픽 이후 성숙한 연아선수의 표정 하나하나. 아름다운 고전의상까지 더해져 내 마음 속 세기의 작품으로 기억되었다.


그녀의 시작을, 전성기를, 올림픽을, 은퇴를 함께 볼 수 있었기에 우리는 축복받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세기의 선수를 어느 때 우리가 또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손끝 하나로 꿈을 꾸게 만드는 이런 소녀를 어느 때 또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김연아선수 이후로 우리는 눈이 너무 높아져버렸다. 끊임없이 또 한명의 '천재소녀'를 찾았다. 기다렸다. 뉴스에서 '제2의 김연아'라고만 하면 눈이 번쩍 뜨였고 그 선수들을 관심있게 지켜보았으며 선수들의 발전을 보며 박수를 치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응원했다. 수많은 선수들이 떠오르다가 부상이나 체형변화로 스러져갈 때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성취들을 사랑스럽고 절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도 한편으론 '또 언제 김연아 선수같은 천재소녀를 만날 것인가'라는 생각에 조급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인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바로 '유영 선수'였다.

11세 8개월로 종합선수권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소녀. 그 뒤로 '제 2의 김연아'라는 꼬리표가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던 소녀. 마음 속으로 소녀를 응원하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소녀가 '베이징 올림픽'을 꿈꾸었기에 나도 어느순간 베이징 올림픽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소녀가 훨훨 날아오를 시간을 함께 꿈꾸게 되었다. 2~3년 전 소녀가 체형변화를 겪으며 주니어 마지막시절 슬럼프에 빠지고 '그만둘까'까지도 생각했다고 할 때 마음이 아팠고, 다시 시니어로 와 이악물고 노력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연아 선수'의 뒤를 이어줄까 관심을 가졌지만 차차 나는 소녀의 '성취'보다는 '과정'에, '순위'와 '메달'보다는 소녀의 '마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어린 소녀가 꿈을 갖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사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이 꿈을 위해 소녀는 몇천번을 빙판에 넘어지고 쓰러졌을 것인가.

엄청난 몰입과 목표의식으로 달려나가는 소녀를 보며 10대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부담과 육체적 고통이기를 바랐다.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달려온 소녀가 혹시라도 선발전에서 탈락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소녀는 좋은 컨디션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얻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순간을 향해 나아갔다. 지난 주일.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의 베이징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경기가 있었다. 러시아 천재소녀 발리예바의 도핑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 와중에 소녀의 얼굴은 침착했고 생기가 있었다.

- 오랫동안 기다려온 올림픽이니만큼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순간을 즐기겠다.

는 아름다운 자세였다. 오랫동안 갈고닦은 트리플악셀을 '완벽'은 아니지만 두번 다 '성공'하고 큰 실수 없이 쇼트와 프리를 마친 소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소녀의 경기 매 순간순간이 감동이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 땀과 눈물로 이 시간을 준비해왔을까 생각하니 안쓰럽고 감격스러웠다.


최종 순위 6위.

사실상 (발리예바를 빼고) 5위. 오랫동안 목표해 온 '메달'은 아니지만 값진 성과였다. 김예림 선수는 9위. 멋진 결과였다. 연아키즈로 성장해온 선수들이 세계 톱 10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한 사람이 심어준 '꿈의 힘'은 이토록 놀라운 성과를 불과 10년 안팎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녀들에게 나는 맘껏 박수를 쳤다. 아. 물론 남자 싱글의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차준환 선수에게도 마찬가지. 아직 10대에 불과한 그들의 어리지만 성숙한 꿈과 노력, 아름다운 결과에 맘껏 환호를 보냈다.


이들의 과정을 보며 나는 또 한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천재소녀'를 찾아헤맨 우리들, 또 한명의 '김연아'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피겨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눈물과 땀으로 노력하는 선수들을 위한 것도 아님을. 중요한 건 메달도, 메달의 색깔도, 순위도 아니다. 오늘에 오기까지 달려온 소년소녀들의 꿈과 노력. 목표와 스러지지 않은 정신.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김연아 선수 이후에 한국 피겨는 수많은 선수들이 그 뒤를 이어 '피겨의 계보'를 완성해 왔다. 곽민정 선수가 있었고, 김해진 선수와 박소연 선수가 뒤를 이었으며, 이후 최다빈 선수가 빈자리를 메우고, 이후 임은수 선수, 김예림 선수, 유영 선수, 그리고 다음 세대들이 또 바톤을 이어받을 준비를 마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올림픽 메달'을 꿈꾸며 도전하지만 결국은 그들도 알 것이다. 메달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의 꿈이었다는 것을. 도전이었다는 것을.

메달만을 목표로 하고, 천재소녀만을 바라는 세상은 러시아와 같이 도핑으로 만들어진 '천재기계소녀'들을 양산해내고, 시상식에서 '은메달은 싫어!'라며 화장이 다 지워지도록 울분을 토한 트루소바같은 행복하지 않은 선수들을 키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의 '천재소녀' '제2의 김연아'를 기다리지 않기를 바람다. 천재소녀.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던 나 역시 어른답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대신 오늘도 노력하는, 수없이 많은 어린 소년소녀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오늘을 응원한다. 그들의 앞날에 비록 높은 순위와 메달이 없더라도 그들이 땀흘린 '오늘'에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기를 바란다.

경기를 마친 유영 선수와 김예림 선수의 행복하고 만족스런 표정이 그래서 더욱 뿌듯하고 기특하다. 그녀들은 지나온 시간들에 행복하고 만족했을 것이다. 스스로 꿈을 꾸고 목표를 향해 달려온 시간들에 감사했을 것이다.


이 소녀들.

뭔가를 쫌 아는 녀석들이다.

뭔가를 너무 모르는 어른들이 부끄러워지게 하는 소녀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