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잔나비'가 나에게 글을 쓰게 한다.

by 밤호수

우연히 유튜브에서 듣게 된 그의 노래.

도대체 이 가수는 어디에 있다가 이제서 내게 왔을까?

'잔나비'라는 이름을 그토록 듣고 들었는데 관심조차 가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의 노래는 먼 시간을 돌고 돌아 내 귀에, 내 영혼에 그냥 꽂혀 버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고 해야 할까. 잔잔하면서도 깊은, 사연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목소리. 지나가버린 옛 생각을 나게 해주는 멜로디. 영화같이 아프고도 충만한 가사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눈이부시던 그 순간들도

가슴아픈 그대의 거짓말도

새하얗게 바래지고

비틀거리던 내 발걸음도

그늘아래 드리운 내 눈빛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할 일이 잔뜩이라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만

온몸의 세포가 온통 귀에 꽂고 있는 잔나비의 노랫소리에 집중되고 있다.

도대체 얘네 누구니!

어떻게 2020년대에 활동하는 가수가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야!

이건 최소한 태어나서 60년은 살았어야 나올 감성이라고.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감성을 낼 수 있는 거야!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눈물이 자꾸 흘러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잖아.

아까부터 자꾸 집중이 안된다고 했는데,

이유는 오직 '잔나비'였어.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음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는 많지.

좋은 노래 가사도 많다.

그런데 아픈 가사를, 좋은 멜로디에, 원래부터 자신의 목소리에 이 노래가 담겨 있는 채로 태어난 듯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많지 않지 않은가.


나의 노래는 대부분 2000년 이전에 생명이 끝나 있다.

내가 몹시도 사랑하고, 들으면서 몸과 심장이 동시에 반응하는 노래는 2000년이 마지막이다. 그 해에 나의 마지막 연애가 시작되었고, 학창시절도 끝났고, 나의 파릇했던 청춘의 추억들도 대부분 고이 접혀졌으니까.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1년'이 마지막 세대의 '나의 노래'랄까.

그에 비해서는 요즘 노래도 많이 듣고 걸그룹 노래도 많이 찾아듣는 편이다. 좋은 노래는 좋으니까. 음악을 사랑하고. 그런데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난 건 너무 오랜만이다. 자그마치 2020년에도 활동하고 있는 젊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갖가지 기억들이 밀물처럼 흘러나와

나를 그 시절. 그 공간에 데려가는 밤이다.

노래 한 곡에.

짧은 멜로디 한 소절에.

마치 향수의 뚜껑을 열면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변하듯

나의 한평도 차지하지 못하는 이 몸뚱아리 속도

온통 다른 기억과 향기들이 점령하고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향기.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만 그럴 수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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