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짱니 Jul 03. 2024

뻔하지 않은 건배사

피할 수 없다면 준비하자

공무원이라면 피할 수 없다


이맘때면 남몰래 준비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건. 배. 사.


10년 전,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 


"자, 우리 과에 여러 새 얼굴들이 왔는데요, 방송작가였다니까 짱니 씨부터 건배사 들어 볼까요?"


'뭐? 건배사? 난 준비도 안 됐는데, 건배사를 지금?'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없다. 그저 '이 순간만 지나면 돼'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의미 없는 말들만 나열했던 것 밖에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뭐 이런 초등학생 수준의 말들을 내뱉으며 시간을 때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런데 '이 순간만'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건배사 역사는 '그날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어공'이 되기 전에는 건배사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였으니 회식 분위기도 그야말로 '프리'했다. 회식은 정말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다음 방송을 잘 준비하자는 각오로 술잔에 기대어 솔직한 생각을 나누는 편안한 자리였다. 


반면 공무원 조직의 회식은, 정말로 업무의 연장이다. 그래서 형식이 존재한다. 


누군가 사회를 보고, 차례로 '건배사'를 한 후 그만큼의 술잔을 비워낸다. 물론, 최근 3~4년 사이 공직 사회의 회식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만, '건배사'만은 건재하다. 


고로, 상하반기 인사이동이 마무리된 이즈음부터 슬슬 건배사를 준비해야 한다. 새로 들어온 직원은 물론이고 기존에 있던 직원들까지 빠짐없이 마이크가 돌아가는 경우가 흔하다. 


'건배사, 피할 수 없으니 준비하라!' 10년 공직 세월이 알려준 가르침이다.



'나'를 담은 건배사를 준비하라


단, 스스로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건배사에 나를 담아 보겠다는 것. '진달래', '청바지', '이멤버리멤버'이런 뻔한 건배사는 내가 아니어도 반드시 누군가 한다. 


실제로 한 자리에서 건배사가 겹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앗, 저거 내가 준비했는데..' 하면서 급하게 뒤돌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본다. 나 역시 그랬다. 그만한 낭패가 없다. 


사실, 건배사는 아무 죄가 없다. 그 건배사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사람과 문화가 잘못이지. 그러니 나부터라도 바뀌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공무원의 회식에서도 건배사가 제 빛을 발할지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한 7년 전쯤, 빛을 적이 있다. 지방도시 시청에서 근무할 때 '멋진 건배사는 저런 거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해외 도시 단체장과 기업 바이어들을 초청한 국제 행사였다. 주빈 중 한 명이 청중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좌중을 바라보며 30~40초 정도의 짧은 연설을 건배사로 대신하였다.


'한국의 작지만 강한 도시 00 도시와 우리 00시와 인연이 시작되는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해 영광'이라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말이었다. 


건배사를 대하는 그의 진중한 태도와 행사의 의미를 더하는 메시지가 만나 자리의 격을 한층 높였다. 건배사만으로 품격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가 유일하다. 그 이후로 내가 들어온 건배사들은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들이었다. 때로는 너무 성적인 농담이 섞여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한다. 어쩔 수 없이 건배사를 해야 한다면 내가 있는 그 자리만큼은, 내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그 순간만큼은, 작은 가치라도 만들고 싶었다. 


나는 건배사에 '나'를 담는다. '나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뽑아낸 짧은 구절을 선후창 문구로 제안한다. 


다음 주면 우리 과도 회식을 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건배사를 준비했다. 내 옆에 새로 온 짝꿍을 환영하는 마음을 담아...

보통 '첫인상은 잘 안 바뀐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짝꿍이 있었어요, 저랑 짝꿍 된 걸 정말 싫어했던 친구인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제 쌍둥이 언니를 좋아했던 거예요. 얼굴만 똑같고 성격은 정반대인 제가 짝꿍이 되니까 싫어했던 거더라고요. 그런데 며칠 지나서는 제 괜찮은 구석을 봤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지냈어요.

새로 짝꿍이 되신 00님, 저를 좀 어려워하시던데, 제 겉모습만 보지 마시고 제 좋은 구석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사로 '첫인상도, 바뀐다' 하겠습니다!  '첫인상도', '바뀐다!'




건배사에 나의 이야기를 담아보세요. 

나의 가치, 그 자리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직 첫인사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