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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영 Aug 06. 2018

그림책 속 Girls Can Do Anything

 지금껏 여성들에게 씌워졌던 프레임 중 하나는 여성이 늘 의존을 필요로 하는 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런 프레임을 깨기 위한 움직임이 커져가는 요즘,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가 딱 어울리는 작품들도 눈에 띈다. 성별에 따른 프레임에 얽매이기보다는 주체적이고 진취적으로 묘사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한국의 그림책과 프랑스의 그래픽노블을 한 편씩 소개한다.     

<그림책, 키프로스 초콜릿>

 세상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파티시에 파포스. 그녀의 하루는 오래된 초콜릿 가게 ‘키프로스 초콜 릿’에서 달콤한 향기와 함께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특별한 날마다 특별한 초콜릿을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부활절을 맞아 초콜릿 토끼를 만든 파포스는 그 중 하나를 집으로 가져오고, 그날 밤 그리스의 키프로스 섬을 배경으로 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하고, 따뜻한 숨결을 얻은 조각상은 갈라테이아로 재탄생한다. 잠에서 깨어난 파포스는 머리맡의 초콜릿 토끼가 희고 복슬복슬한 진짜 토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음 날, 부활절 저녁도 평소와 다름없이 저물어간다. 그러나 파포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가게에 남아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신중하게 재료를 고르고 틀을 꺼내지만, 그녀가 만들려는 것은 단순히 판매용 초콜릿이 아니다. 파포스는 지금껏 꿈꿔왔던 것들을 한데 모아 자신만의 뮤즈를 빚어낸다.

피그말리온 신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일러스트레이터 조영륜의 첫 책이다. 재미있게도 파포스라는 이름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예술작품 안팎에서 뮤즈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들은 영감을 준다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보여지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키프로스 초콜릿」에서 파포스는 뮤즈들의 계보를 잇는 대신 스스로 뮤즈를 창조해낸다.     

 이야기뿐 아니라 구성요소와 제작 방식도 꽤 신선하다, 서양 신화에서 모티프를 차용했지만, 붓으로 그린 듯 날렵한 그림체며 작품 속 분위기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책의 진행 방향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작가 조영륜은 이 작품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성별을 바꿨을 때 느껴지는 낯설음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선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작가가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할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조영륜 공식 홈페이지 http://magmague.tumblr.com/    


<그래픽노블, 보테>    


 중세 프랑스의 어느 마을, 모뤼는 모두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모뤼는 하도 생선 비늘을 벗겨 몸에 비린내가 배어버릴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 흉측한 두꺼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 두꺼비가 바로 저주에 걸린 요정이었던 것이다. 모뤼의 눈물 덕분에 저주에서 풀려난 요정은 모뤼에게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을 걸고, 아름답다는 뜻의 보테로 이름을 바꾼 모뤼는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면 분명 뻔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그 후로도 보테의 삶은 전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성적 대상화가 되고, 하나뿐인 가족까지 잃는다. 도망치던 와중 마을 영주의 눈에 띄어 구조된 보테는 억눌려왔던 욕망을 삐뚤어진 방법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권력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세상은 점차 그녀를 차지하려는 남성들의 피로 물들어간다.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보테는 문득 깨닫는다. 지금껏 자신은 아름다운 전리품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 때부터 그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보테’라는 하나의 주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보테는 역사에 남을 전쟁을 불러일으켰던 헬레네에서 직접 창과 방패를 든 아테나가 된다.     

 수많은 단면으로 이루어져 더욱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처럼, 『보테』는 다양한 메시지와 주제의식으로 더욱 빛나는 작품이다. 작가 위베르와 콤비 일러스트레이터 케라스코에트는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끔찍한 현실과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정의내리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란 가능한 것인지 등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개구리 왕자나 신데렐라 같은 설화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것도 꽤 흥미롭다.    

 사실 모든 여성들은 한 번쯤 모뤼였으며 보테였고, 때로는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들은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공주는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 뛰어다니고 신부수업 대신 정치에 참여한다. 보테 역시 스스로 힘을 키우며 왕국의 통치자가 된다. 어쩌면 『보테』는 단순히 보테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의 성장담일지도 모른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Girls Can Do Anything. 이 짧은 문장에는 무한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변두리로 밀려나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모든 이들은 성별로 나누기 이전에 같은 인류라는 점에서 동등하다.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고,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를 가두어왔던 이분법적 프레임을 이제는 깨 버릴 때다. 그런 점에서 보테와 파포스의 이야기는 더욱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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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인디포스트'에서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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