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홍 Jan 10. 2021

끄적끄적

터널

기차는 열심히 달린다. 정해진 기찻길에 몸을 싣는다. 한치의 오차도 없다. 시원한 바람, 차가운 빗물이 그대로 온몸에 부딪친다. 신나게 달리다 보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잊게 된다. 뒤를 돌아봐도 최초에 출발한 그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속도를 줄여보자.


흐르는 강물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보인다. 눈이 부시다.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저 멀리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바위가 나를 응시하며 바라본다. 코스모스 향기에 잠시 눈을 감아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를 건너 터널이 보인다. 작고 검은 점은 나를 점점 빨아들인다. 이내 터널 안은 한 줄기 빛 뿐이다. 그런데 모르겠다. 내가 달리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터널 안에 온 몸이 박혀 버린 것 같다. 소리만 요란하다.


저 멀리 희고 하얀 작은 점이 보인다. 나를 감싼 크고 넓은 소리들이 나를 잡아당긴다. 터널에서 머문 자리가 왜 이리 포근할까. 검은 점들이 속삭인다. 머물고 싶다. 흐르는 강물도, 거대한 바위도, 코스모스 향기가 기억나질 않는다.


열심히 달려야 한다. 정해진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흐르는 강물도, 거대한 바위도, 코스모스 향기도 느끼고 싶다. 누가 뒤에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누가 앞에서 끌어당기는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잠시 멈추고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작가의 이전글 고요한 스키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