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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May 14. 2021

높은 곳에서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 두 다리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한 발 내딛는다. 계단은 내 삶의 무게만큼 답답해 보인다. 또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하나, 둘, 셋. 숫자들이 남겨진다. 그냥 주저앉고 싶지만 무의식 속에서 나는 또 한 발을 내딛는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더니 찬바람이 느껴진다. 방금 지나온 길을 뒤돌아 봤다. 무표정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뱀의 검은 목구멍이 멈춰 서 있다. 조금 가벼워진 두 다리를 앞으로 움직여 본다. 찬바람이 내 온몸의 세포를 자극한다. 털이 솟아나는 걸 느끼며 수평선 넘어 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난간으로 걸어갔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어루만져본다. 차가운 껍질과 같은 살갗에 따스한 한 숨을 불어넣는다. 두 눈을 감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구름 속에 작지만 뚜렷이 보이는 누군가가 손을 흔들어 댄다.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빨려 들어갔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작은 것들의 움직임은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개미와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존재들이다. 무거운 두 다리는 차가운 바람에 흔들거렸다. 가벼운 솜털과 같다. 작은 개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본다.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혹시나 해서 또 흔들어 본다. 당연하지만 왠지 계속 흔들고 있다.


잔잔한 물가에 따스한 바람이 내 손을 녹여주고 있다. 흔들거리는 낙엽 사이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작은 의자에 포개 여진 몸은 곤히 잠자는 어린 아가와 같았다. 아무런 잡념도 없다. 작은 새소리가 들린다. 내 머릿속에는 숫자가 없다. 작은 소리만이 평화롭게 나를 졸리게 하고 있다. 내 몸은 한 없이 땅속으로 내 마음은 한없이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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