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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 Jan 07. 2024

옷장 속에 녹아든 삶의 온도



마음이 괜스레 동하는 시기가 있다. 그런 시기에 잠기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내 마음의 결에 덧대어 보곤 한다.






조금 긴 여행을 끝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관계가 가져다준 다양한 감정들이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넘실댔다. 설렘, 행복, 좌절, 두려움 그리고 공허감. 넘실대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는 멀미를 느껴 쓰러지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울렁거림을 견디며, 꾸역꾸역 발을 밞았고 쓰러져 있는 마음을 잘 챙겨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나의 몸과 마음을 뿌옇게 만들던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나만큼 많은 먼지를 감당하고 있었을 옷장 속 옷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옷장을 활짝 열었을 때 마주한 옷들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았다. 괜히 마음이 찌르르 아려왔다.  



먼저, 양말들을 정리했다. 서랍장에는 짝이 없는 양말들이 제법 보였다. 언젠가는 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간직해 둔 것들이다. 이제는 버리기로 했다. 짝 없는 양말들을 집어 한쪽으로 휙 던지는 내 모습이 불현듯 냉정하게 느껴졌다. 짝이 없다고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듯이, 한 짝 신세가 돼버린 양말도 저마다의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모순적이게, 그런 연민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나의 손은 매정하게 그들의 가치를 분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들고 온 캐리어에는 한 짝 신세가 돼버린 양말들이 담겨 있었다. 



옷들이 걸려있는 옷장을 열었다. 새 옷을 샀던 설렘이 시간에 따라 바랜 옷 색만큼이나 바래있었다. 쌓인 먼지들이 그 옷들에 대한 나의 애정 또한 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바래진 마음과 가려진 애정 속에서, 더 이상 관심받지 못한 채 옷장에 갇힌 옷들이었다. 그들은 홀로 쌓여가는 먼지의 무게를 견뎌내며, 주인과 다른 옷들 간의 왕성한 교류를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설레서 잠 못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날들을 지나 설렘은 바래지고, 익숙함이 쌓여가며 서로의 말과 행동이 뿌옇게 보이는 시기가 오기도 한다. 때때로는 서로를 향한 서운함이 상대를 향한 감정을 지배해 마음이 헤지기도 한다. 그 빈티지한 관계가 좋아서 더욱 애정이 짙어지기도 하지만, 해진 관계가 되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관계를 정리하기도 한다.  잊고 있던 옷들을 바라보며, 처음과 달라져버린 그 옷들을 향한 애정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예뻐서 산 옷인데 영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평상시에 손이 가지 않는 옷들이 있다. 관계도 그렇다. 언뜻 보기에 참 멋진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나와 통하지 않는 사람, 또는 나 다운 모습을 잃게 만드는 사람은 결국 내 사람이 아님을 깨닫기도 한다.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이 있듯이, 나에게 맞는, 서로의 존재를 빛내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그 존재를 발산했을 내 옷장 속 옷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추억과 체취가 묻어있는 옷들이 있다. 빨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때로는 노스탤지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옷들의 존재는 나에게 꽤 강력하다. 어릴 때 나는 엄마의 잠옷을 참 좋아했다. 홀로 두 자식을 키워야 했던 엄마는 부단히 도 일을 하셨고, 집에는 거의 계시지 못하셨다. 나는 집에서 엄마의 잠옷에 묻어있는 체취를 맡으며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 또는 함께 맞춘 옷에는 함께한 추억과 뒤섞인 체취가 묻어있다. 잊고 있었던 그런 옷들을 발견하면, 그 추억 속의 감정들과 우리가 참 소중하고 그립다. 그 얄궃은 마음에, 괜히 스스로에게 소심한 탄성을 내지르기도 한다. 힘들 때 더욱 짙어지는 그리움이 민망해, 비가역적인 추억들이라는 깨달음에, 그 누구에게도 발산할 수 없는 탄식. 이렇게 감정에 물결치는 나를 볼 때면 나는 차가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더 이상 나의 뜨끈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말할 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존재만큼이나, 나도 아니 더 힘들어야 한다는 냉정을 찾으면서 그 옷들에 묻은 애정들을 애써 외면해 본다. 



차마 버리지 못한 옷들이 있다. 아무리 보풀이 일어나고, 찢어져도 그 옷만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참 소중하다. 이미 이어나가기 힘든 관계임에도 그때의 우리가 그리워 괜스레 혼자 동아줄을 쳐다보는 때가 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소중함도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을, 아니 어쩌면 시간에 따라 제발 무뎌질 마음을 바라며, 나는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추억의 옷들도 하나씩 버려나갔다. . 



옷 정리를 하면서 세상과 나의 다양한 온도들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서 느꼈던 차가움, 미지근함, 따뜻함, 그리고 뜨거움.
내가 본디 가지고 있던 차가움, 미지근함, 따뜻함, 그리고 뜨거움.

이 세상과 나의 온도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그 뒤섞여버린 온도들 속에서, 나는 냉정과 온정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비행기 안으로 새해의 햇살이 들어앉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나간 경험이 아름다웠든지, 고통스러웠든지 간에 따뜻함으로 그 경험들을 감싸면, 왜 나는 마음이 아플까. 그래서일까? 여러 온도들이 존재하지만 따뜻함이 가장 지키기 어렵고 외면하기 쉬운 온도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따뜻함이 가장 아름다운 운도라는 것을 믿기에, 지켜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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