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되고 싶다
제게 디자이너는 정말 매력적인 직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 어쩌면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아트보다는 디자인을 선택했던 것도 평소 "나의 기분" 보다는 "상대방의 기분"을 더욱 중요시 하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상관이냐구요? 제가 기획한 서비스와 디자인에 대해서 유저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리서치하고, 가설을 세우고, 가상의 페르소나부터 실제 유저까지.
기획에 담긴 유저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고요.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았고, 제게 굉장한 성취감을 안겨주었어요.
늘 설렜어요. 그리고 가끔은 상상했어요.
"내가 만든 디자인대로 서비스가 개발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순간부터 일까요, 제게 디자인은 액자에 갇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준에서 꽤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결국 제 맥북의 한 폴더에서 잠자고 있더라구요.
어느정도 퀄리티가 나오는 작업물의 경우 포트폴리오로써 비핸스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지만,
최초에 디자인을 하고자 했던 "유저가 이 서비스를 사용하면 어떨까?" 라는 호기심이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죠.
지금 생각 해보면, 제가 굳이 개발자가 되지 않아도 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방법은 많았던 것 같아요.
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자와 협업을 한다든지, 조금 더 참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취업했다면 말이예요.
물론 그때까지 '디자이너 지망생으로써 버텼다면' 이라는 전제가 있을 때요.
대학교 3학년부터 과제, 소모임에서 디자인할 때 늘 이런 생각이 따라왔어요.
"어차피 개발 못하잖아"
늘 끝까지 디자인해도 어차피 내 폴더에서, 비핸스에서 액자처럼 걸려있을 디자인을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했던 것 같아요.
한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풀타임 근무를 한 적이 있어요.
사실 제 전공과 아주 관련된 디자인을 하는 회사는 아니었고, 편집 디자인을 하는 회사였어요.
"어차피 개발 못하잖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전까지의 모든 과정은 너무나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까지도 재미 없는 첫 번째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디자인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의뢰한 디자인 결과물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대학교 들어와서 정답처럼 공부했던 디자인들이 전면 부정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유저 상대로 "내 기획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 기획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하는 디자인을 하게 되니까 급격하게 재미가 떨어졌어요.
사실 자체 서비스나 브랜드가 있는 인하우스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제게 디자인 에이전시는 정말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된거죠.
디자인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고 늘 생각했지만, 디자인의 과정의 주체도 내가 아니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세상이라는게 하고싶은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요. 참 재미없었어요.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감,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기획 의도를 잘 전달했다는 성취감.
그 무엇도 이 과정에서 느껴지지 않더라구요.
아마 회사 한 번의 경험으로 너무 급히 결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 이 경험은 "디자인이 항상 재미있을 수는 없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아주 갚진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사실 조금은 충격이었죠. 그 전까지는 늘 재미있었으니까요.
디자인에 대해서 다소 흥미가 떨어진 상태로 대학교 3학년을 맞이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개발에 대한 꾸준한 관심은 있었어요. 막연한 동경심이었죠.
저는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영상연출과를 졸업했는데, 이 학교에는 컴퓨터게임제작과가 있거든요.
컴퓨터게임제작과 친구들이 고급스러운 메모장 같은 프로그램에 영어를 우다다 치고 엔터탁! 누르는데 멋진 게임이 실행되는 거예요.
그냥 그때부터 막연한 동경심에 "개발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교 입학할 때 "게임소프트웨어 전공"을 부전공 신청하고, "나도 한 번쯤 개발 공부 해봐야겠다!" 하고
한 번도 수업을 듣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위처럼 디자인에 대해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타이밍에
C프로그래밍 수업을 처음으로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학점은 C였는데 A+받았을 때보다 더 재미있게 수업을 들었어요.
"디자인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 "개발의 주인공은 나..일지도?"
이전까지 느꼈던 고민의 완전 반대의 경험을 한 느낌이었거든요.
사실 디자인도 어느정도(?) 할 수 있고, 개발도 할 수 있게 되니 간단한 웹 개발 정도는 제가 직접할 수 있게되었어요.
대부분의 게임 소프트웨어 전공의 학부생의 게임의 코드는 정말 대단했지만, UX/UI는 다소 엉성했어요. 어찌보면 당연하죠?
그런데 저는 UI도 입히고 시각적으로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는 강점이 생긴거에요.
물론 그만큼 대부분 전공 학부생보다는 개발 능력이 떨어지겠지만요.
그리고 반대로 원래 전공인 디지털미디어디자인에서 코딩 수업이 한참 많이 생기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이 수업에서 게임소프트웨어 부전공하며 배웠던 개발 지식이 도움이 되는거예요!
개발 공부를 시작했더니, 양쪽 전공에서 모두 시너지가 나는 것이 느껴졌어요.
학점뿐만 아니라 제가 조금 더 경쟁력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게임소프트웨어를 복수전공으로 변경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실무에서도 디자인 경험이 있는 개발자는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크게 보면 위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개발자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작은 사건들이예요.
이름 모를 작은 에이전시 회사에서 근무한 시간이 제 진로를 180도 틀어버렸잖아요?
사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여전히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사소한 사건으로 진로를 너무 급격하게 틀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영상연출과에 입학한 이유는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학교에서 단편 영화를 촬영 해보니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15살인데 2-3년 투자해서 공부했으면, 사실 꽤나 많은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알아본 것이 모션그래픽 디자이너였어요.
영상연출과 졸업한 장점을 활용하고 싶었고, 그래서 디지털미디어디자인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모션 그래픽도 저와 맞지 않았죠.
성취감과 진취감으로 공부하는 타입인데, 모션그래픽은 1주일 밤을 새서 길어야 2-3초 재생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어요.
성취감을 느끼기까지가 너무나 멀어 오랜 시간 끈기있게 작업하는 동기가 너무 부족했던 탓인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꽤나 많은 경험과 직업에 대해서 제 자신과 Fit한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어찌 보면 매우 작은 사건이었던 "디자인 에이전시" 근무로 느꼈던 제 경험이
개발자로써 진로 변경이라는 시도로 발전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더라구요.
제 자신에게 "이건 도망이 아니야, 더 나은 방향을 위한 진통이야" 라고 마인드셋 하는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결국 그 진통은 제게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어찌보면 개발자라는 직업은 디자인을 포기한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여전히 개발하며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있고 UI개발 하며 디자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