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이 주는 온도

by 김진희

한동안 하지 않던 당근을 최근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보이스피싱의 두려움 때문에 당근에 물건을 올려놓고도 역 앞 같은 공중적인 장소가 아닌 굳이 집까지 오겠다는 사람들과 채팅하다가 곧 공포감이 엄습해 와 거래를 취소하고 결국엔 앱조차 삭제하고 한참을 지냈었다. 달콤한 말,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특히나 당근앱은 익명 뒤에 숨어 돈을 미끼로 사기를 치는 자들의 은신처 같아 내게 대표적인 '주의 요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회사 선배님이 당근에서 구입한 음식쓰레기처리기가 너무 만족스럽다며 내게도 당근에서 구입해 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리하여 잊혔던 당근앱이 내 핸드폰에서 다시 살아났다.


물품을 검색하던 중 동네 주민 한 분이 대학로 연극 공연티켓을 무료 나눔 올리신 게 눈에 띄었다. 문고리 거래였고, 내가 손을 들자마자 당근앱에는 초록색 글씨로 예약 중이라는 글자가 추가되었다. 난 간단한 몇 자로 의사를 전함으로써 연극티켓의 예비 주인공이 되었다.


놀라움은 그 이후로 시작되었다. 나눔 해주신 분이 자신의 아파트 호수와 비밀번호까지를 모두 남겨주신 것이었다. 온라인으로 잠시 만난 ''라는 사람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고 이렇게 삶의 깊숙한 것을 공개해 주시는 것일까?

예전의 나도 최태성의 한국사 교재 같은 걸 대면 나눔하거나 거래물건을 우편함에 놓고 간 적도 있었지만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난 뒤에는 노출의 발생 상황 뒤로 꽁꽁 숨는 것이 안전한 것이라 믿어왔던 나였던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돈을 이용해 세상을 음지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한편에서 돈과 상관없이 세상을 양지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세상은 아직 살아볼 만한 곳이 되어주는 것일까?


문고리에 걸린 연극티켓은 비닐팩 안에 또 비닐팩으로 정갈하게 이중 포장되어 담겨 있었다. 이날 내가 체감한 거래온도는 예상했겠지만 오랜 세상에 대한 불신, 공포감과 같이 내 안에 담고 있던 얼음장 같은 차가움을 깨트릴 만큼 높았다.


대학로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하늘이 투명하게 비치는 비닐우산에 튕겨나가는 경쾌한 빗방울 소리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공연장에 가서는 목젖이 보이도록 고개를 젖혀 올리고 실컷 웃고 왔다.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보호막이라 믿으며 어깨에 걸쳐왔던 '내가 지킬 안전수칙'이라는 무거운 방탄조끼를 잠시 벗어놓은 듯 가뿐한 중력으로 세상을 딛는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어 글을 올리고, 시간을 정하고 물건을 챙기고, 후기를 남기는 일련의 귀찮은 과정을 거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데도 이득이 생기지 않아도 자신에게 생길 번거로움과 노출에 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많다.


그리하여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라,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믿어주고,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기에...


누군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가진, TV에는 결코 나오지 않을 한 소시민의 온정과 나눔이 꽁꽁 문을 걸어 잠가왔던 내게 긴 여운을 남긴다.


오늘도 당근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새 주인을 찾으려고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예약 중'에서 '예약완료'로 위치를 바꾸다 당근에서 사라진다. 세상사는 온도를 서서히 올려가면서...


실명도 아닌 가입 시 당근에서 자동으로 부여받은 가상의 '환한 달님' 닉네임이 전부인 내게 속 끝까지 비치는 투명한 나눔으로 당근해주신 님께 감사드리며, 덕분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는 걸 이 자리를 빌려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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