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조잘거리다 문득 엄마 손에 담긴 봉투가 눈에 띄었다.
"엄마 이건 뭐야? 시장 갔다 왔어? 말을 하고 가지~나도 델꼬 가지~ 엄마 뭐 샀어"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혼이 빠진 엄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다 한참이 지난 후 입을 열었다.
"너 좋아하는 청국장 해주려고 오랜만에 이것저것 좀 샀어, 너 깨기 전에 오려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엄마의 모습에 이내 따뜻함이 몰려와 좀 전의 불안과 혼란함은 쏙 사라졌다.
"에이~ 청국장은 냄새나서 싫은데~" 냄새 고약한 청국장을 샀다는 말에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내가 이런 고약한 냄새나는 음식을 좋아할 리 없었다.
엄마는 말없이 웃으며 듣는 둥 마는 둥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엄마가 사 온 비닐에 다른 먹을 것은 없을지 뒤적뒤적거리다 귤망에 담긴 주황빛 탐스러운 귤을 꺼내 들었다.
거실에 앉아 만화채널을 돌려대며 상큼한 귤을 거의 한 망 혼자 다 까먹었을 즈음 코를 찌르는 청국장냄새가 온 집에 진동했다.
"악, 엄마 냄새가 진짜 너무 구려!! 안 먹을 거야~~!!"
'이런 걸 내가 좋아할 리가 없잖..'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냄비 앞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응?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이렇게 냄새나는 걸 어떻게 먹어?' 말과 다른 몸의 반응에 엄마는 것 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웃음이 얼굴에 만연했다.
'꿀꺽'
삼켰다.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맛있는 목 넘김에 구수함이 혀끝곳곳에 스쳐 기분 좋은 잔향만이 남는 느낌이다. '청국장이 이렇게 맛있다고?'
예상 못한 맛과 몸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고슬고슬 갓지어낸 윤기 흐르는 희 쌀밥과 아삭한 식감의 오이고추 소박이가 차례로 상위에 차려졌다. 그 모습에 마음이 급해져 식탁에 앉아 허겁지겁 입천장이 델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었다. 한 입 한입이 꿀맛이었다. 밥이 이렇게 달았나 싶을 만큼 너무 맛있어 어느새 한 공기가 다 비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조용히 한 그릇을 더 담고 계셨다. 두 번째 받아 든 공깃밥을 반쯤 먹어갈 즈음 엄마는 조용하지만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네가 중학교 때 처음 청국장을 먹은 날도 이랬어. 그날부터 너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청국장으로 바뀌었었지. 네가 결혼하고 다 좋은데 엄마 청국장 못 먹는 게 젤 속상하다 할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어. 청국장.."
처음이다.
엄마가 먼저 추억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건.
나의 기억이 이상해지고 이 뒤죽박죽 생활이 시작된 그 첫날 이후로 처음으로 엄마가 먼저 입을 여신건 그날 이후 처음이다. 엄마는 계속 묵묵히 들어만 주셨다.
내가 하는 말들과 행동들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셨다.
순간 당황한 내 모습을 눈치채신 듯했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고 차가운 물 한잔을 컵에 따르며 내 앞에 놓아주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넌 오렌지보다 귤을 더 좋아했어. 한입 가득 입에 통째 넣고 오물거리면 오렌지보다 과즙이 입에 더 가득 담기는 그 느낌이 좋다고. 그래서 약간 작은 크기의 귤을 앉은자리에서 열개고 스무 개도 먹곤 했어."
그리곤 흘깃 내가 까먹다 만 귤의 잔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입맛은 그대로 인가보다"
"응?" 하고 엄마의 시선이 닿은 곳을 돌아보니 어느새 열개들이 한 망이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 언제 저렇게 먹었지?' 생각해 보니 애기 주먹만 한 크기의 귤을 껍질을 까서 통째 먹거나 두 조각으로 나누어 두 입에 해치웠다.
"다시 차근차근 하나씩 찾아가 보자,
우리 처음부터 차근차근 찾아가보자.
우선은 네가 좋아하던 음식, 장소, 놀이 같은 것부터 천천히.
우리 아들 다시 엄마가 잘 키워볼게! 두 번째니까 이번엔 더 잘 안 하겠어?" 웃으며 담담히 말씀하시는 엄마의 눈이 붉게 촉촉해진다.
"응!! 다시 시작해 볼게!!"
맛있는 식사를 한덕분인지 왠지 모를 자신감과 용기가 샘솟는다. 뭐든 다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