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헌책방 기담 수집가>
”책은 작가가 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 <헌책방 기담 수집가>, 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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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상한 헌책방이 있습니다. 인터넷만 되는 곳이라면 새로 만들어진 물건이 어디로든 배송되는 이 시대에 헌책방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헌책방과도 조금 다릅니다. 바로 ‘책을 찾아주는’ 헌책방이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에는 특정한 책을 찾기 위해 오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찾는 책이 절판되어 더이상 일반적인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대개 전국에 숨어있는 헌책방을 찾아다닙니다. 빛바랜 종이와 먼지냄새 가득한 책장에서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책을 발견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한 헌책방의 사장님은 그들이 찾는 책을 전국 각지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찾아냅니다. 대신, 그 대가로 책을 찾으려는 사연을 듣습니다. 책을 찾는 이유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수수료 대신 받는 것이지요.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사장님이 직접, 바로 그 사연들을 엮은 책입니다.
사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책이라는 사물의 물성에 대해 먼저 생각해봅니다. 같은 이야기,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엮여있느냐, 어떻게 번역되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표지의 디자인이나 제본 방식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와 같은 조건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 ‘같은 책’으로 묶일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책에 자신만의 낙서나 다정한 이의 편지가 더해진다면, 그것은 ‘우주에 한 권뿐인’ 책이 되고 맙니다. 다른 사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지요. 소수의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의자나 가구를 살 때 특정 날짜에 생산된 물건을 콕 찝어서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옷을 구입할 때도, 영화를 보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연이 더해진 물건이야 물론 많겠지만, 그 시절의 내가 경험한 그 판본이어야만 의미가 있는 사물은 거의 없습니다. 또 흔히 책은 대량으로 ‘찍어내는’ 물건으로 인식되지만, 모든 책이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이, 또 충분히 길게 생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판매가 저조해서, 새로운 개정판이 출간되어서, 출판사가 문을 닫아서… 여러가지 이유로 한 권의 책은 새 책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헌 책으로서의 두번째 생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연유로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은, 남은 평생을 다 써서라도 찾고 싶은 책으로 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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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들은 왜 책을 찾아나서야만 할까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책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책을 찾으러 왔다는 건 그에게 더이상 그 책이 없다는 뜻이고, 책이 없다는 건 언젠가 그것을 버렸거나 잃어버렸다는 뜻일 테지요. 그는 한 권의 책을 어느 시절엔가 놓쳐버렸고, 그건 책을 둘러싼 관계와 추억, 시공간과의 단절이기도 했습니다. 그게 자신에게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너무나 소중히 여기면서도 미처 그것을 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불현듯 그 책이 떠올랐을 겁니다. 혹은 사는 내내 마음에 품고 살다가 어느날 용기를 내어 책방 문을 두드렸을 겁니다. 잊고 살았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책이 ‘인생의 문제’가 되어서 그를 덮치게 된 것이지요.
책을 찾는 이들의 사연을 읽으며 느낀 것은, 책만 낡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책이 헌 책이 되어가던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꿈 많던 소녀도, 치기어린 청춘도, 인생의 무게를 막 깨닫기 시작한 가장도 얼마간은 ‘헌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헌’이라는 관형사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 앞에 쓰여 그 뒤에 오는 사물이 낡거나 오래 되거나 처음의 상태에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낡거나 오래 되거나 처음의 상태에 있지 않음. 그 의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어떤 날의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포장도 뜯지 않은 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혹은 뒤늦게 새 것이었음을 깨닫곤 합니다). 채운 것보다 채워나갈 것들이 많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여기며 말입니다. 그러나 물건의 색이 바래고 ‘생활기스’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나날이 모습을 달리합니다. 처음 포장을 벗길 때의 설렘은 무뎌져가고, 남겨진 생활과 수많은 상처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부딪히고 긁히고 쓸린 자국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국면이 우리를 통과합니다. 물건으로 비유하자면 ’교환할 수 없는’ 상태의 변화나 손상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선택들이. 우리는 그렇게 비가역적인 손상과 선택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조금씩 낡은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문득 스스로가 헌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은 한 사람이, 지난 날의 자신이 잃어버린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책방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가 찾으러 온 것은 그저 책 한 권이 아니라 참을 수 없이 그리운 한 시절, 영영 멀어져버린 관계, 잊고 살았던 꿈이거나 그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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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인생에 대해, 또 책방에 대해 절반만 이야기한 것이 됩니다. 살아간다는 건 물건이 낡아가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어떤 상처는 스스로 아물기도 하고, 생활기스 정도는 자연스럽게 옅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스스로 힘을 내어 성능을 업그레이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책을 찾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스스로를 낡은 사람이라고 여기던 그들이 기어이 찾던 책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손님은 시간강사로 일하던 동생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동생이 전공한 철학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평생 운동만 해서 공부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말입니다. 중년의 남자는 맞선을 준비하기 위해 첫 부분만 읽었던 소설의 뒷부분을 사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찾아 읽습니다. 그 사십 년 동안 그는 그때 맞선에서 만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병으로 그녀를 떠나보냈습니다. 서슬퍼런 시대에 저항하고 싸우던 이들을 뒤로 하고 소극적으로 살았던 젊은날을 부끄러워하며, 그 때 읽지 못한 신영복 선생의 책을 다시 찾는 이도 있습니다. 그 한 권의 책은 새롭게 공부를 시작할 계기가 되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꿈을 되새겨 주기도 하고, 어린 날의 사랑을 추억하게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코너를 돌게 될 즈음 뼈저리게 느낄 깨달음을 사연의 주인공들은 우리보다 조금 먼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연의 주인공들에게 책을 찾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의 빚을 갚고 다시 원동력을 얻기 위한 실마리이자 베이스캠프입니다. 비유하자면 책방에서 그들은, 삶을 다시 수리하기 시작합니다. 대화와 이야기에 치유의 기능이 있듯이, 눈물에 정화의 기능이 있듯이, 삶의 제어판을 열어 먼지를 털고 전지를 갈아 끼우는 일을 책방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수리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쉽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은 느끼고 있듯이, 삶은 잘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니 말입니다. 잔고장이 많고 연약해서 부서지기 쉬운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우리는 번번히 멈추고 삐걱대고 퍼지곤 하겠지요. 그래도 우리에게 행운이랄 것이 있다면 스스로 고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작동이 완전히 멈추는 날까지, 스스로 삶을 수리해나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또 언젠가는, 책방 문을 나서는 그 한 사람이 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렇게 이따금씩 다시 삶이 열릴 수 있기를, 한 권의 책이 다시 펼쳐지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