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장소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

키타큐슈 스페이스월드에서의 추억

by RNJ


추억의 장소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

여행지에선 일상적인 아침마저 특별해 보입니다
나의 첫 해외여행


초등학교 6학년 때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본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저에겐 첫 해외여행임과 동시에 반 친구들과 떠나는 첫 여행이었죠. 처음으로 여권도 만들고 환전도 해보고 설레는 마음에 며칠 동안 잠자리를 설치곤 했습니다. 부산여객터미널에서 친구들과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하며 여객선에 올랐고, 처음 보는 음식 자판기와 맥주 자판기(초등학교 6학년이?), 새롭고 신기한 광경에 혼이 팔려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었던지라 후쿠오카와 기타큐슈의 다양한 유적지들을 며칠 동안 둘러보다, 드디어 아이들의 로망인 놀이공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혈기왕성한 초등학생들이 사찰 관람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와 친구들은 고삐 풀린 경주마처럼 놀이공원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오락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폐장시간이 다 되었더군요. 공원 내에 위치한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배에서 이상신호(?)가 느껴졌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식당 화장실이 폐쇄되어 있었고 저는 인근 건물의 한 화장실에서 큰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왔는데 놀이공원의 모든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물론 로맨스 영화가 아닌 미스터리 호러영화였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키타큐슈 스페이스월드, 그곳에서의 잊지못할 밤


13살 먹고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을 줄이야


대낮의 놀이공원은 길을 물어볼 사람도 많고 지도도 훤히 보이지만,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진 놀이공원은 미로같이 느껴지더군요. 여행을 떠났을 당시에는 휴대폰 보급률이 높았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휴대폰으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휴대폰 불빛을 따라 길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13살짜리가 처음 와본 외국에서, 사람 하나 없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훤한 대낮에, 우리나라에서 길을 잃어도 당황스럽고 짜증이 나는데 늦은 밤 외국에 홀로 남겨진 그 기분이란!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유행했던 책 중에 '00에서 살아남기'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와 정글에서 살아남기는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놀이공원에서 살아남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도둑이 아니고서야 문 닫힌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을 일이 있겠습니까! 저 스스로도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00에서 살아남기' 시리즈에는 조난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으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구조요청을 해야 한다고 나와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놀이공원에 조난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고, 저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기억을 하나 둘 더듬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방향을 잡을 때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높이 솟아있는 놀이기구입니다. 기타큐슈 스페이스 월드에는 커다란 우주왕복선 모형이 있었는데 아침에 놀이공원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우주왕복선 위치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더듬어 출발점으로 거슬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저 멀리 놀이동산과 연결된 숙소 통로가 보였고, 저는 불빛이 보이자마자 그곳을 향해 전력 질주하였습니다. 숙소 입구에 도착하고 사람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오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스릴 넘쳤던(?) 놀이동산에서 살아남기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하... 숙소에선 친구들이 저를 찾고 있었고 저는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산책 좀 하다 왔다고, 그냥 그렇게 말했습니다. 13살 먹고 길을 잃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쪽팔리니깐.




저의 이런 추억이 담긴 키타큐슈 스페이스월드가 폐장되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미 폐장을 하여 홈페이지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더군요. 그 당시 우주왕복선 모형으로 꽤 유명했던 놀이공원이었는데 아마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고객들을 유치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평생에 하루였던, 어쩌면 되게 작은 기억이지만 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이상하더군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어쩌면 이런 감성적인 면들이 우리를 더 사람답게,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당연한 사실에 슬퍼할 줄 안다는 것, 너도 나도 모두가 겪은 일들에, 앞으로 겪을 일들에 대해서 함께 공감하며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점. 우리는 언제가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도 과거가 되어 흘러가고 있는 현재를 사랑하며, 함께 슬퍼하며 살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필요한, 어쩌면 가장 소중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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