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고시원은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편입니다. 사실, 고시원은 손님을 맞이하기에 그다지 적절한 장소도 아닙니다(제가 사는 고시원은 화장실이 투명창으로 되어있고, 창의 윗부분이 개방되어 있어 화장실 냄새가 방으로 그대로 들어오고, 방음이 전혀 안 되는 것은 덤입니다). 좁고, 방음이 안되며 간단히 차 한잔하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죠. 그래서 고시원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전자기기를 오래 보면 눈이 건조해짐과 동시에 종종 눈에서 통증이 느껴지곤 해요. 취미생활만큼은 전자기기에서 벗어나 보기로 다짐을 하고, 인터넷에서 체스 세트를 구매했습니다. 눈이 아프거나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 홀로 창가에 앉아 체스를 두곤 합니다. 머리를 식히려고 시작한 취미였는데, 지금은 머리를 쥐어짜가면서 홀로 체스를 두고 있습니다. 저 쉬고 있는 거 맞겠죠?
드라마 '퀸스갬빗'과 '미생'. 그리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얼마 전, '퀸스 갬빗'이라는 드라마가 흥행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체스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선수의 대국, '미생'이라는 드라마 방영 이후에 바둑이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체스 정보 사이트, 온라인 체스 게임 이용자가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2020년 대에 가장 크게 증가한 검색 키워드 중에 하나가 바로 '체스'라고 하더군요.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전게임 체스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체스는 64칸의 전쟁터에서 흑과 백이 전쟁을 벌이는 게임입니다. 다양한 기물을 활용해 상대방의 '킹'을 무력화시키면 이기는 게임이죠. 대부분의 보드 게임들이 그렇듯이, 체스에도 '오프닝'이라는 나름 정형화된 전략이 있습니다(바둑의 정석처럼). 초반 진형 싸움에서는 어느 정도 선택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기물들이 선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은 치열한 수싸움을 전개합니다.
체스판의 핵심전력은 바로 '퀸', 여왕입니다. 퀸은 재미있는 역사를 가진 기물인데, 초창기의 체스에서는 퀸은 어느 방향이건 한 칸밖에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리에노르, 엘리자베스 1세,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1세 같은 강력한 여왕들이 활약하면서, 체스판의 퀸이 가장 강력한 기물로 승진(?)하게 됩니다. 강력한 여왕의 등장으로 인해 게임의 규칙이 바뀐,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체스에서 퀸과 같은 핵심 기물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8개의 폰이 필요합니다. 폰은 보병의 역할을 수행하며 진형을 만듭니다. 초기 움직임을 제외하고 한 칸 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기물이라 약하고 쓸모없는 기물로 보일 수 있지만, 폰이 상대방 기물의 접근을 적절하게 막지 못한다면, 공격과 수비 어느 하나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즉 체스는 모든 기물이 공동전선을 이루고 연합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체스판의 '폰'은 특별한 규칙을 적용받습니다. 전장의 끝까지 달려 상대방의 진영에 도착한다면, 킹을 제외한 모든 기물로 승급할 수 있죠. 물론 폰이 방해 없이 전장의 끝에 닿을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그러나 끝에 닿기만 한다면 가장 강력한 기물인 '퀸'으로 승급할 수 있습니다. 전장의 흐름은 폰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변화도 당장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한동안 취미생활이 '사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취미와 휴식조차 발전과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더군요. 독서를 할 때도 소설과 에세이는 밀어 두고 재테크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몸을 만들 수 있는 운동을 찾고 있었고요. 홀로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취미가 취미가 아니고, 휴식이 휴식이 아닌지 제법 오래 시간이 흘렀고,나도 모르는 사이 '재미'를 잊고 사는 것에 익숙해졌더군요.
왜 갑자기 어린 시절에 즐기던 체스가 생각났을까요? 순수한 재미를 쫓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재미와 휴식의 중요성을 제가 잊은 채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홀로 체스를 두면서 방향이 없는 조급함과 불안감을 조금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조그마한 재미와 행복을 맛볼 수 있었고요. 때론 클래식(classic)과 심플함에 정답이 있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