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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말, 편자를 꺾어 신고

by R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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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말. 제주말을 보고 있자면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가 떠오릅니다. 제주 사람들은 말에 멍에를 지운 채 밭을 갈았고, 본토에 전란이 벌어지면 군마를 헌납했죠. 말의 중요성이 떨어진 오늘날에도 승마 체험, 경마, 마상공연, 고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소비하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중산간 도로를 달리다 보면 넓은 목장 한편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살찐 말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버스는 구부러진 길을 한참 달려 마상 공연장과 승마 체험장에 학생들을 내려놓습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한양으로'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도는 말을 키우기 적합한 섬이었습니다. 비교적 온난한 기후로 말을 먹일 꼴이 풍부했고, 말이 목장을 가출(?) 해도 섬을 벗어날 일이 없었죠(제주도는 오랜 세월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섬이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사육두수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말이 사육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제주도입니다. 이동수단이라는 타이틀 잃은 말은 주로 경마를 목적으로 길러지며, 기량이 떨어지면 승마장이나 체험장에서 여생을 보내죠.


은퇴마를 애완동물 사료를 만들기 위해 불법적으로 도축했다는 소식이 뉴스에 종종 등장합니다. 은퇴마 처우를 문제삼은 외국 말 사육 업체는 한국에 말을 더 이상 수출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기도 하였죠. 박지성 선수의 응원가로 유명했던 '개고기 송'이 인종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시국에 불법 도축과 폭력적인 사육 방식으로 '말 학대국'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한 식문화와 사육 문화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하는지, 세계화 시대 속 다수의 보편적 원칙에 순응해야 할지. 다만 너무 많은 존재를 그저 물질적인 상품으로 치부하는 자국의 현실이 다소 우려스러워 보이긴 합니다. 경제적 가치를 못하면 사람마저 무쓸모한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동물들의 권리는 우선순위가 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말사육의 수익성이 악화되자 말 목장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운영하던 목장이 매각되자 전망 좋은 자리에는 대규모 리조트와 골프장이 들어서고, 말이 떠난 초지에는 풍력발전기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갑마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녹산로 가시리 마을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유채밭은 인기 관광 명소가 되었죠. 인적이 끊긴 시골길 곳곳에 말을 잃은 마방이 방치된 채 흩어져 있습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수명이 다한 형무소가 떠오릅니다. 마방을 떠난 말들을 어디로 떠났을까요?


콘크리트 벽 사이를 헤매는 느린 바람, 죽음으로 자유를 찾았다는 고독한 울음소리가 침묵의 선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텅 빈 마방을 보고 있자면 고시원 쪽방의 어두운 복도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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