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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공원, 공감의 공간

by RNJ Mar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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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립니다. 학생들의 입에서 메마른 탄식이 새어 나옵니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 발이 묶인 채, 스마트폰으로 기상 예보를 뒤적이며 스크램블 에그를 입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다행히 오후에는 비가 그칠 것 같습니다. 창문에 달라붙어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애처롭습니다. 학창 시절, 체육시간을 앞두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저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이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모를 햇빛의 등장을 기다리며, 모두가 체육복을 갈아입은 채.


 여행에서 '즉흥성'이라는 단어는 참 매력적인 단어입니다만, 내가 인솔하는 여행에서 돌발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빠르게 대체지를 제시해야 고객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죠. 섬 곳곳에 흩어진 대체 여행지를 적절한 시간을 두고 꿰어내는 것도 일입니다. 비슷한 입장료, 적절한 거리, 단체 입장 가능 여부, 휴무일, 운영시간... 그리고 제주도에 얼마 없는 '실내'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반면에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방문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도 있습니다. 바로 4.3 평화 공원. 지도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자, 제주에서 꼭 둘려보아야 하는 공간. UFO처럼 생긴 초록색 기념관은 넓은 공원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세월의 빛을 머금은듯한 자연스럽고 푸른 청동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넓은 야외 공원에서는 다양한 예술품과 풍성한 식목을 만나볼 수 있으며, 실내 전시장은 제주의 가장 아픈 상처인 4.3의 기록을 품고 있습니다.


 "외삼춘 머리를 장대에다가... 미치지 않고 베견?"


 하루는 공원에서 러닝을 하다가 토박이 어르신과 잠시 말동무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돌보았다는 어르신은 덤덤한 말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는 왜 해자들이 4.3을 두고 말문을 열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참혹했던 기억을 그 누가 다시 꺼내 놓고 싶겠습니까? 어떤 생존자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숙한 육지의 산속으로 영영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제주 시내의 한 전시장에서 4.3 유족들의 편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품에 안겨 숲으로, 동굴로 숨어들었던 아기는 이제 손주까지 본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에게 쓴 편지 모음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수 있었죠. 유족들은 자신의 휴대폰 번호와 집 주소를 편지에 남겼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부모님의 혼령이 혹시나 자신들에게 찾아오지 못할까 봐, 혹여나 어디선가 전화를 걸어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헛된 기대라도 적어보아야 했고, 무작정 건네보아야 해소되는 응어리가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다리며. 그들은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을 겁니다. 버티고, 견디며.


 단체 관광객은 4.3 기념관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기념관의 모양과 색감은 정말 특별하면서도 자연스럽습니다. 부드러운 색과 형태는 스스로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천방지축인 아이들도 지도사와 선생님의 단단한 당부 아래 차분하게, 보다 진중하게 행동합니다. 영상을 함께 보고, 실내 전시장을 둘러보고, 우리는 야외로 나가 산책을 합니다. 재미가 없으면 언제나 곧장 버스로 돌아오던 비둘기 같은 아이들이, 이번에는 제법 오래 기념관을 둘러봅니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빗속을 달리던 버스가 기념관에 도착하자 구름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빗물이 한라산의 먼지를 모두 닦아내었고, 우리는 가장 맑은 시간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지도사는 다시 전화를 돌리고, 일정을 바로 잡습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고, 무작정 동조하기보다는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 보자." 감정을 헤아리고, 이성적으로 정리해 보자고. 가짜 뉴스와 언어의 오용은 현시대의 가장 큰 모순점이자 경계해야 하는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온전히, 제대로 이해받고 소통하기 위해 이런 침묵의 공간을 세웠을 겁니다. 아직 세상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많은 학생들에게, 이곳이 보다 깊게 사유할 수 있는 고요한 쉼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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