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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변신

방사탑(2023)

by RNJ
방사탑


제주도 이주민들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이 하나 있다.


"제주도는 문화 생활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나?"


큰 도시에서 살았던 이들은 고립된 섬에서 문화격차를 느끼며 이런저런 아쉬움을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미술 전시, 콘서트, 스포츠 경기 등 대도시에서 누렸던 당연한 옵션이 이곳에 사치품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허전함이란! 큰맘 먹고 육지를 방문하는 이주민의 부리부리한 눈은 문화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제주 현대 미술관은 인적이 드문 한경면 저지리에 있으며, 제주 유나이티드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는 한라산을 넘어야 한다(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제주시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보다 서귀포시가 멀다고 여긴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림 같이 걸자. 벽 하나 채워봐라.


제주에서 만난 많은 작가들은 문화를 소비함과 동시에 생산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편을 하염없이 동경하고 바라보기만을 거부하고, 이곳에서 영감의 결과물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지는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은 바다에서 작은 별빛을 만든다. 결국 예술의 주체는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며 제주도는 그릴 것이 정말 많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섬의 끝자락 우도에서 시작된 우아해 예술 공동체 멤버들은 아름다움과 문화를 발견하고 새롭게 창출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유로움에 매혹되어 찾아온 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일은 엄청난 행운이 아니었을까?


준비도 열심히 했고 무대도 마련되었는데 춤을 추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발길을 끌어당긴(그리고 놓아주지 않는) 미혹의 섬에서 만난, 나만의 아름다움을 정의하고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즐거움과 고생스러움을 함께 선물했다. 그리기 위해 여행을 떠났고, 쉼표를 찍기 위해 펜을 들었다. 다이소에 들려 만년필과 스케치북을 하나씩 샀고 예술 소비자는 예술 생산자로 역할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의와 타의가 반씩 섞인 변화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발품의 흔적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서는 열 장의 풍경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발품을 팔고 수십 장의 사진을 뒤적이다 종이 앞에 앉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스케치는 일절 하지 않기로 했다. 펜촉이 처음으로 흘러가는 그 길을 바로 종착역으로 삼아 첫 그림을 첫 전시회에 걸기로 했다. 집중해서 선을 잇다 보면 조금씩 실루엣이 드러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족스러운 결과물(계획과는 전혀 다른)이 불쑥 만들어진다. 길을 잃을 때마다 느낀 반동과 두려움이 언제나 새로운 방향을 찾아주었다. 나의 그림이 나의 삐뚤어진 길 위에 서있길 바랐다. 학습으로 체화된 기술이 없기에 일탈을 즐길 수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기가 약한 지역에 현무암을 쌓아 방사탑을 세웠다. 척박한 섬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염원과 기대는 시대를 한참 건너서야 후대의 혜택으로 응답받았다. 인간의 생체 시계는 하늘과 소통하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시작하고 멈추는 것이 아닐까. 역할을 다한 돌탑은 무너지거나 흩어졌고, 지금은 돌하르방처럼 제주를 상징하는 하나의 심볼이 되어 이곳저곳에 새로 쌓이고 있다. 도슨트가 없는 자연의 오래된 전시장에 남은 무너지는 예술 작품 앞에서 옛사람들의 노고와 의지를 상상해 본다. 방사탑을 그리고 자연만이 목도할 수 있는 늘어진 시공간의 흔적을 채워 넣었다. 고립을 선택한 섬사람은 새로운 불을 발견했고, 먹이를 받아먹던 어린 새는 마침내 둥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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