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를 인생을 낭비한 혐의로 고발한다.
<빠삐용, 1973>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갤러리를 찾아온 지인들은 그림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부터 바삐 찾았다.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휘두르며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지만 육지 사람에게 제주도 방문은 타임어택과 다름이 없다. 근황을 묻고 그림을 잠시 둘러보면 벌써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린 새롭고 낯선 공간에서 익숙한 대화를 나누었다.
"살다 살다.... 별 걸 다한다 야."
"우리가 안지가 벌써 10년... 되지 않았나? 왜 몰랐지?"
"선배는 이렇게 살 줄 알았어."
함께 걸어온 행적에서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을 때, 놀라움과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무심함을 새롭게 인지할 수 있다. 기대가 없었기에 감정의 폭은 넓어지고, 찾아오는 이의 먹먹한 설렘은 우리의 대화를 비평에서 조금 떨어뜨려 감상 근처로 슬쩍 붙여준다. 우리의 머릿속에 담긴 흑백사진은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보며 최소한 하나 이상의 메시지를 제대로 짚어낸다. 그림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일부였다.
"야, 부럽다. 제주도에 살고 이런 것도 해보고!"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성숙한 방황을 용기라고 칭찬해 준다. 도시의 일상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던 나는 그들의 근면과 성실을 동경한다. 크고 작은 시련은 방황하는 겁쟁이를 이리저리 흔들었었다. 고시원 골방의 어둠에서 1년을 버티다 계획 없이 찾아온 제주도. 연고도 직업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었다. 과거에 벗겨내지 못한 짐과 때를 모두 벗어던지기 위해 쉼 없이 걸으며 마찰을 만들었다. 녹초가 되어 길가에 널브러질 때 자유로운 바람의 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무모한 일탈이 하나의 도전과 성취로 이어졌고, 방황의 시선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충분한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평온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이 사실을 깨닫자 몹시 슬퍼졌다.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비뚤어진 기억을 다듬고자 노력했다. 이젠 슬픔의 장소를 찾아가면 눈물의 짠내가 아니라 땀과 흙의 향기가 느껴진다. 기존의 통념을 무시하고 새로운 설득을 시작했다. 누가 들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림과 시를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정말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수차례 고민하다 겨우 겨우 종지부를 찍었다. 손을 떠난 손때 진득한 작품은 이제 감상이 어려웠고 권태로움마저 느껴졌다. 창작의 열정은 천천히 달아올라 즐거움이 느껴질 때쯤 빠르게 식어버리곤 한다. 고민 끝에 가감한 요소를 보고 있자면... 설익고 섣부른 실천에 대한 아쉬움만이 가득 남는다. 결국, 다시 펜을 들었다. 때론 무식하게 노력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을 때가 많다.
13장의 그림과 17편의 시를 전시했다. 서론은 완성했고, 이젠 본론을 시작할 차례다. 나는 어쩌면 근면과 성실함이 부족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쏟아야 할 그릇의 모양이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