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시대들

by RNJ


치부

전후 세대의 베이비 부머, 벨 에포크, MZ세대.... 우리는 사회 구조에 막대한 변화를 끼친 중대한 사건이나 도구와 기술이 교체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하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미래가 지목한 전환점을 중심으로 한 세대의 인상이 결정될 땐 부분이 전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다.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극에 달하였으며, 파나마 운하 스캔으로 프랑스 전역이 뒤흔들렸고 이와 관련하여 뇌물수수에 연루된 국회의원이 자그마치 100명이 넘었다. 대한민국 베이비 부머(baby boomer) 세대의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100명 수준으로 2020년의 약 50배에 달하는데 이 시기의 아이들은 많이 태어난 만큼 많이 죽었던 것이다.


일본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없는 시대적 구분이 하나 남아있다. 아직 천황이 존재하는 일본은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기년법 중 하나인 연호를 사용하는데, 한 남자의 시작과 끝을 기준으로 세대를 나누는 방식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N포 세대나 사토리 세대와 같이 외부 집단, 주로 기득권 세대로부터 정의 내려진 몰이해나 비방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아 오히려 중립적인 의미로 느껴진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레이와' 이전의 '헤이세이'는 버블 경제로 인한 불황의 시대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쇼와'시대는 낡은 것 또는 꼰대라는 인상을 풍긴다고 한다. 다만, 연호 지정은 더 이상 천황의 권한이 아니고 내각 회의가 연호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기득권 관료들의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일본인이 레이와 7년으로 삼는 2025년, 나는 교토의 2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이끌려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단출하게 배낭여행을 하고 있던지라 매일 빨래를 널면서 하루를 시작했는데, 일본 어린이들은 부모님과 어떻게 등원하나 궁금하기도 하여 잠잠히 등원길을 지켜보았다. 쇼와 3년, 자그마치 1928년부터 아이들을 돌봐온 니조 보육원의 원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부모님의 자전거에 실려 등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를 등원시킬 땐, 어린이집의 좁은 주차장이 SUV로 북새통을 이뤄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어야만 했다. 주차장이라곤 자전거 주차장 밖에 없는 니조 보육원 앞에서는 누구도 갑자기 차에 들이박힐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쇼와 시대의 오래된 유산은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어떤 어린이집보다 현대적이었다.


출처 : 중앙일보


일본에선 아이를 최대 2명까지 태울 수 있는 전기 자전거인 '마마차리'가 인기 혼수품인데, 범국민적인 인기에 힘입어 마마차리 경주대회까지 열린다고 한다(우리로 따지면 유모차 달리기 대회랄까). 게다가 일본은 차고지 증명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있으며 불법 주정차 3회 적발 시 면허가 정지된다. 오르막길이 적고 살인적인 교통비와 자동차세로 때문에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을 수밖에. 도심 어디를 가나 자전거 주차장을 볼 수 있었고 공기는 한국에 비하여 아주 쾌적한 편이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되어 있어 한국처럼 클락션 소리가 빵빵 울려 퍼지며 서로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일도 없었고,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당연스럽게 모든 차량이 정차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선진국-후진국 프레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1971년 : 자동차 사고 사망자 2만 1000명, 부상자 95만 명, 도로교통 특별법 위반자 167만 명.


이 말도 안 되는 수치는 놀랍게도 바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여기는 일본의 경제 부흥기에 벌어졌다. 사망 사고의 절반이 보행 중 또는 차량 승하차 중에 발생하였으니 과거 일본의 교통 문화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가히 상상이 안 될 정도. 넘쳐나는 자동차로 1950년대 오사카와 도쿄의 대기오염 수준은 세계 최악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2,52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1991년도에 1만 3천 명이 도로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매드맥스>의 사막레이스도 이보다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자동차 산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낸 여러 나라 중 하나임과 동시에 '편의'와 '경제'라는 이름 하에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외면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에 출범한 UN CTAD(유엔무역개발회의)는 일본을 선진국 그룹에 포함시켰으며, 한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선진국 반열에 오른 두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저출산과 높은 자살률이라는 만성 질환에 함께 걸려버리고 말았다. 일본은 출산율을 부분적으로 회복함과 동시에 자살률이 감소 추세로 접어들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자살 예방 예산은 여전히 일본의 1/50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사람이 40살이 될 때까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존재는 암이나 타르, 돌진하는 자동차 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말은 그 맛이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고, 매일 40명이 자살로 세상을 떠남에도 우리는 이웃의 자살에 무덤덤한 철혈인들이 되고 말았다. 2004년 즈음부터 언론에선 '자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2014년부터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지만 오히려 우리는 극도로 죽음에 무감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정부는 2023년 40페이지가 넘는 '5차' 자살 예방 기본계획을 내놓았지만 1년 만에 자살자가 1,000명이나 늘어났을 뿐이다. 자살 예방 기본계획이 태어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가끔 전철이 폐쇄될 때가 있었다. 화재, 기계 결함 등 다양한 사유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것은 '인신사고'. 철도 위에서 벌어지는 인명사고의 60%는 자살자이고, 매년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다. 철도 회사는 직장에 늦은 시민들에게 '지연증명서'를 발급해 주며, 폐 끼치는 일을 삼가는 일본인들은 지하철 인신사고와 지진을 제외하면 약속에 늦는 경우가 없다는 슬픈 농담도 있다. 거의 모든 역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대한민국과는 달리 일본은 약 30~40% 역에만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으며, 어른의 허리 가슴팍 아래 높이에서 설치가 끝난 경우가 많았다. 2025년까지 스크린도어 설치율을 100%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공영 지하철과 민영 철도회사는 50년 만에 열리는 오사카 엑스포가 끝날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2007년, 91세의 노인이 철도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일본의 오부시에서 벌어졌다. 노인을 치매를 앓고 있었고 고령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집을 나가버리고 만 것이다. JR도카이는 유족을 대상으로 약 7,000만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였고 놀랍게도 1심과 2심 모두 JR도카이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20년 가까이 따로 떨어져 산 아들에게도 소송이 제기되었고 1심에선 아들에게 절반의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1심과 2심은 모두 '부인이 민법상의 감독의무자로 남편의 죽음을 예방하지 못했다'였다는 판결 근거를 제시하였고, 시민 사회가 사법부의 후안무치한 결정에 경악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최고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졌는데, 10년에 가까운 시간 한 가정이 사법부가 방기한 폭력에 시달리고 만 것이다.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학교에서 '이수현'씨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았었다. 취객을 구하기 위해 철로에 뛰어든 유학생 이수현 씨의 안타까운 희생은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에 실렸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다소 깊이 있는 질문을 어린 학생들에게 던져주었다. 유학생이었던 이수현 씨는 당시 재학 중이던 학교에서 학교장을 치러 주었고 장례가 끝난 후 고향 부산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난달에 한국을 방문한 이시바 총리는 일본 총리 최초로 이수현 씨의 묘역에 참배를 다녀왔고, 한국인에게도 잊힌 그의 오래된 이름이 나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오랜만에 이수현 씨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추모 사이트에 방문했다. 나보다 21살이 많았던 선한 인상의 아저씨는 24년이 오늘날에도 26살의 청년으로 머물러 있었다.


당시 이수현 씨의 신원을 확인했던 교장 아라이 도키요시 씨는 조위금으로 유학생을 위한 장학회를 만들어 달라는 유족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수현 씨의 아버지는 "대체로 자식이 부모의 뜻을 물려받지만 우리는 자식의 뜻을 부모가 물려받겠다"는 의사를 전달함과 동시에 아들의 기일과 장학금 수역식에 매년 아내와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이수현 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어머니인 신윤찬 씨가 장학회의 명예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류 스타 배용준 씨의 일본인 팬클럽을 포함한 1,000명이 넘는 일본인 후원자가 1,000명의 아들과 딸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수현 씨의 이야기는 일본인 감독 하나도 준지의 간곡한 요청 끝에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시사회에는 천황 부부 내외와 아베 전 총리의 아내가 참석하였다.



제주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홀로 잠들지 못한 아빠의 머리속엔 이러한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의 시대가 무엇으로 기억될 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 마마차리의 시대, 자살의 시대, 선진국의 시대, 화합의 시대, 반목의 시대.... 이 시대를 살아보았을지 지금은 알 수 없는 미래의 결정권자는 크고 작은 사건 중 무엇을 선택하여 우리의 이름을 지을 것이다. 쉼 없이 부딪히는 크고 작은 시대의 충돌은 균열을 만들 것이고 언젠가 우리의 시대를 산산이 부수어낼 것이다. 우리의 잔해 위에선 어떤 표정을 지은 인간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까?


"아이들이 태어나면, 언제나 아이들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 크리스토퍼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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