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에 수동적인 연애를 주로 했다. 나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남자친구가 정하는 대로 맞춰주며 연애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남자친구가 원하는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자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춰주는 새로운 느낌의 남편에게 더욱 끌렸던 것 같다.
남편은 꼭두각시였다.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고 내가 먹자는 대로 먹었다.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인 적이 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맞춰주는 배려 남이었다. 거기다 밀당에 ‘밀’자도 모르는 연애 초보였다. 그냥 좋으면 좋은 대로 밀어붙이고 애정 표현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쏟아냈다. 꼭 나 없으면 당장 죽을 것 같이 보이는, 나한테 완전히 빠져버린 사람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첫눈에 반해 내 연락처를 알아냈고 은근슬쩍 다가와 남자친구가 있는지 알아본 뒤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어떤 선물을 해줘도 다 마음에 들어 했고, 심지어 본인이 나에게 선물할 것조차 나에게 선택권을 주며 내가 원하는 것을 사라고 했다. 데이트 장소 또한 가장 처음 만난 장소를 빼고는 모든 장소를 내가 정했다.
상견례 후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예식장이며 헤어, 메이크업, 신혼여행까지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런 사람은 내 생에 처음 만나봤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고 여러 가지 선택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계획 한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고 내 말이면 뭐든 다 들어줄 것 같은 남편이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 나와 연락 두절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거의 한 시간에한 번은 나에게 연락을 했고, 일어나자마자, 또 잠들기 직전까지 나에게 보고를 했다.
이렇게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준 사람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고 결혼 후 분명 남편이 나를 속 썩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리드하고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본래 선택을 귀찮아하는 타고난 성격 때문에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자기 가족들이 와이프를 괴롭혀도 아무 말하지 못하는, 아니,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우유부단의 끝판왕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연애 중에 시댁 부모님을 세 번 정도 만났던 것 같다. 아버님은 남편이 나를 소개하는 첫 만남에서도 소주를 4병 이상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날도 나에게 살짝 말실수를 하셨지만 처음이니그러려니 하고 크게 마음속에 남지않았던 것 같다.
아버님은 특히 술을 드시면 허세를 좀 부리시는 편인데, 상견례 날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술을 거하게 드시고는 맞은편에 앉아 계신 우리 부모님께 우리가 결혼하면 1억을 주시겠다고 선포를 하셨다.
현재 3억이 있는데 아들이 결혼을 하면 1억씩 줄 거라고 하시면서 우리 부모님 면전에 대고 돈자랑을 하셨다. 그 당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지금보다는 돈에 대해 악착같은 마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주셔도 감사, 안 주셔도 감사한 마음이었으나 결혼한 지 1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1억의 행방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버님, 1억 언제 주실 건데요?.’
나는 술에 취해 나를 괴롭히실 때마다 아버님께 1억의 행방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1억은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한다. 그 집 식구들만 있었을 때 이런 허세를 부리신 거라면 나도 뻥이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상견례 날, 우리 부모님을 마주 보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지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님, 우리 부모님과 내 형제가 있는 앞에서 선포하신 거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