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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Feb 18. 2016

아버지였던 피에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1


첫 날, 생장에서 같은 방을 쓰다


떨리는 마음으로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한 날이었다. 생장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 받고 걸음을 시작한다.


커다란 배낭을 멘 인파를 따라서 순례자 사무소에 가 여권을 발급 받은 뒤, 가장 눈에 띄는 알베르게 하나에 갔다. 방 하나에 놓인 2층 침대 3개.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편이라 그럭저럭 괜찮았다. 짐을 풀고 있노라니 머리가 하얗게 센 외국인 하나가 들어온다.

"Hi, I'm Pierre from San Francisco. How are you!"

날 보자마자 자기가 피에르라고 소개하며 너무도 환한 그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얼떨결에 손을 잡고 내 소개를 시작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게 인연이 되서 피에르를 포함해 같이 방을 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커피까지 먹게 됐다. 커피숍에서 피에르에 대한 얘기를 더 깊이 들을 수 있었다.


피에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20대 초반의 나만한 딸이 둘 있는 아버지다. 퇴직을 한 뒤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한다. 순례길을 여행의 제일 처음으로 잡았는데, 그 뒤에는 유럽 어느 곳을, 어떻게 여행할지 하나도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순례길에서 사람을 처음 만나면 꼭 묻는 질문 하나가 있다.

"What brings you here?"

간단히 "왜 여기 왔니?"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피에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혼을 했다. 이제 애들도 다 컸다고 생각하고, 나 혼자 걸으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길을 더 걸으며 느낀 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솔직해진다. 피에르처럼 이혼 사실 뿐만 아니라, 자식의 죽음, 부모의 폭력 등 나였으면 말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은 사실들을 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털어 놓는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털어 놓는 사에게 어떠한 위로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묵묵히 앞을 보고 걸으며 보폭에 맞춰서 조금 더 오래 함께 걸었을 뿐. 비밀은 소중한 사람을 묶어두는데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입이 근질거릴 때는 아무도 날 모르는 타지에서 털어 놓기 딱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어쩌면 이 순례길이 사람을 헐벗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몇 십 킬로를 걷고, 배가 고플 때 마다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이 원초적이고 정직한 육체생활이 마음까지 솔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생장에서 출발하는 날에도 피에르와 거의 함께 출발해 피레네를 넘을 때 종종 마주쳤다.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또 한 번 마주쳤을 때 피에르가 우비 입는 걸 도와줬었는데, 얼마 전에 피에르가 나에게 내 페이스북 포스팅에 장난스럽게 그 얘기를 댓글로 달았다.



"첫 번 째 스탬프가 좀 젖어 보이는데, 우비 못 입어서 힘들어하는 애 도와주다 그런거 같다?"


피에르의 말 한마디 덕에 저 날 하루종일 순례길을 걷던 생각을 했었다.

비가 오기 시작하던 피레네
피에르가 우비 입는 걸 도와주고 찍었던 사진



아버지였던 그


순례자들이 많이 묵는 큰 마을들에는 알베르게가 여러 개다. (알베르게란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있는데, 공립 알베르게가 보통 수용 인원이 많아 그곳에서 묵으면 전 날 봤던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나는 공립과 사립을 골고루 섞어서 묵었는데도, 매일 매일 피에르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때 마다 두 팔을 벌려 반가이 날 맞아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날 소개할 때도, '첫 날부터 함께 한 친구'라며 꼭 강조하며 사람 좋게 웃고는 했다. 웃는게 너무 선한 사람이었다. 볼 때 마다 자기 딸들이 생각난다며 활짝 웃어주던 피에르.


어쩌다 함께 커피숍을 갈 때면 꼭 자기가 커피를 사줬다. 피에르를 마지막으로 본 로그로뇨에서 바네사와 셋이 함께 커피숍에 갔었는데 피에르가 커피를 다 사버렸다.


피에르와 함께 있을 때 찍은 로그로뇨의 아침

로그로뇨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같은 숙소를 쓰는데, 그가 방에서 딸과 통화하는 내용을 어쩌다 침대에 누워 듣게 되었다. 한국에서 온 조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네 나이 또래다, 파울로 코엘료 책에 영감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네 생각이 많이 난다 등등.


그냥 그 통화 내용이 지금도 많이 생각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통화 내용보다는 피에르가 통화하는 걸 들으며 느꼈던 내 감정들이 아직도 떠올리면 많이 아리다. 피에르는 로그로뇨 가는 길에 다리를 심하게 절뚝대다가 결국 로그로뇨에서 더 가지 못하고 며칠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피에르는 딸과 통화할 때 그런 힘든 것들을 하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몸도 괜찮고, 사람들도 정말 좋다. 그리고 네가 보고싶다.'가 그 오랜 통화의 내용이었다. 괜찮다는 것을, 네가 보고싶다는 것을 이렇게나 사소하면서 다양한 말들로 길게 늘여 전할 수 있을까. 피에르가 딸과 나눴던 시시콜콜한 대화는 모두 딸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피에르가 나를 보고 딸들을 떠올렸다면, 나는 피에르를 보며 우리 아빠를 떠올렸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를 어릴 적에는 참 커보이기만 했던 아빠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도 피에르처럼 다리를 절뚝댄 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걸 숨기고, 윤이 나는 구두를 딸에게 보이며 두 팔 벌려 날 안았을 아빠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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