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킹홀리데이 #7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영국에 오고 나서 첫 한 달은 그림을 꽤나 많이 그렸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작은따옴표로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을 만큼 나는 그림에 젬병이다. 지금 그린다는 것도 차라리 낙서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냥 여기에 와서 그냥 가만히 앉아 몇 십분, 길게는 한 두 시간 씩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는 걸 좋아하게 됐다.
첫 한 달, 그 중 2주 동안은 집을 구하고 구직 하랴 일에 적응 하랴 바빴고, 그 뒤 2주 동안도 일은 시작했지만 가게 친구들과도 아직 알아가는 단계일 때라 나는 런던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프를 받을 때 마다, 출근을 늦게 할 때 마다 런던 여기저기를 쏘다지고는 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오늘은 여기를 갔다가, 이곳을 갔다가, 여기를 들렀다 집에 가야지.'하고 계획만 거창하게 세워두고는 보통 첫 번째, 두 번째 계획했던 장소를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사실 보통은 모든 게 귀찮아져서 뭔가를 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한 장소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가끔 그렇게 쏘다니다 보면, 어떤 장소가 뜻하지 않게 편안함을 안겨 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미리 세워 놓은 계획은 더이상 중요치 않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거나, 천천히 걷거나 하며 그 장소가 주는 편안함을 만끽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복잡했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비울 수 있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초기의 나는 정신적으로 초조하고 불안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완전히 정착했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문서, 은행 계좌, National Insurance number, 개인적 문제 등 끝까지 내 속을 썩이는 것들 투성이었다. 이런 복잡한 서류 더미들이 대충 정리가 되었을 때도, 정작 나 자신은 이곳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정착했다'고 당당하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상황에서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장소 자체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으리라.
처음 그림을 그린 날도 그랬다. 집에서 실컷 늦잠을 자다가 조금 쌀쌀한 바깥 바람에, 다들 일을 간 플랏 메이트들 덕에 조용한 우리 플랏에, 우유를 뎁히느라 나던 전자레인지의 우웅-하는 소리에 문득 외로워졌다. 그래서 내가 런던이라는 사실을 만끽하고 싶어졌다. 내게 런던하면 떠오르던 건 '빅벤'. 빨간 이층 버스가 지나다니는 큰 사거리 한 쪽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갈색의 시계탑이었다.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에서 내려 빅벤 맞은편에 있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에는 온통 관광객 뿐, 사실 이 곳은 진짜 런던 출신의 현지인을 만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진짜 런던을 느끼고 싶다고 하면서, 제일 관광객이 찾을 법한 곳을 찾아 왔다는 생각에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저기 들리는 이탈리아어, 중국어, 스페인어, 일본어. 나는 관광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도 관광객처럼 비칠 거고, 나 스스로도 아직 런던을 '구경'하고 있는 거지 '살고 있다'고 선뜻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억지로 이곳에 나를 끼워 맞출 필요는 없었다. 빨리 맞추려고 성급해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냥 빅벤 앞에 계속 앉아 있고 싶어졌던 것 같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그림을 그려볼 심산이었다. 그래서 그냥 펜을 꺼내 들었다. 연필도 없던 필통이라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쥐고, 제대로 된 노트도 없어서 다이어리 뒤편에 그냥 내가 보고 있는 그대로의 빅벤을 담기 시작했다. 비율도 안 맞고, 선도 울퉁불퉁하고, 그래서 납작 짜리몽땅한 빅벤이 탄생해버렸다.
하지만 이걸 그리는 한 시간 넘게 난 온전히 이 시계탑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떤 복잡한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냥 빅벤의 디테일 하나 하나를 관찰하고, 그리고, 나만의 그림을 완성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는 동안 허리가 조금 욱신거렸던 거 빼면 마음이 꽤나 평온했다.
또, 꽤 오랫동안 빅벤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게 여러 가지 있다. 그림을 그리면 사물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는 것.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디테일에 집중을 해야 했다. 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는 사실 좀 더 큰 부분들에 신경 쓰게 된다. 가령 시계탑의 위치가 화면 어디에 놓이는지, 빛이 얼마나 밝은지. 하지만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런 것들보다 이 시계탑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교하게, 세밀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느낄 수 있었고, 보다 작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게 됐다. 멀리서 보기를 그만두고 좀 더 작은 곳에 깊이 들어가는 느낌. 그래서 더욱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사진은 몇 가지 조정만 다르게 해서 찍으면 다른 느낌의 사진들을 순식간에 만들 수 있으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한 가지 피사체를 찍다보면 금방 질리는 편이다. 그게 한 사람이 장소나 표정에 따라 여러 가지 느낌을 낼 수 있는 인물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림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의 모르는 면들까지 발견하게 된다. 이 빅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나는 빅벤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누군가에게 그냥 민무늬의 지붕이 뾰족한 시계탑 하나를 덩그러니, 시계 숫자도 그냥 아라비아 숫자를 써 넣은 채로 그림을 그려 내밀고 말았을 거다.
이 뒤에도 마음이 편안할 때, 너무 편안해서 사실은 심심하고 할 게 없을 때 종종 그림을 그리게 됐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차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초중학교 미술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자발적으로 뭔가를 그려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지금껏 시간이 나면 무언가 효율적인 걸 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꾸역꾸역 공부를 했고, 대학교 때는 그런 보상 심리에 남는 시간에 펑펑 놀기만 했으며, 고학년이 되어서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가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할 가치있는 것들이 뭘까 고민하거나, 그런 걸 억지로 찾아내서, 또 억지로 하며 시간들을 보냈다. 그 ‘가치있는 시간 보내기’ 안에 ‘그림 그리기’가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게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더 이상 여유로운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장소를 맞닥뜨리면 덩달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동안 가치 있다고 여기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림이 그랬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림 자체를 잘 알지도, 잘 그리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저 ‘여유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된 게 그랬다. 그림을 그린다는 특수한 행위가 가져다주는 기쁨, 이를테면 뭔가를 좀 더 면밀히 보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 역시 이전의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서툴지만 가끔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역시 그림이라는 행위가 매개가 되어 가져다주는 이런 깨달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시간에 더 이상 좇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좋아서, 그리고 하루를 보내는 데 있어 여유를 만끽하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알아서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