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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May 17. 2017

'나'로 봐주세요

영국 워킹홀리데이 #14 가끔은 불편한 말들

몇 시간 전에 지나가면서 10대 중후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들에게 '하이, 차이니즈걸!'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이 친구는 내 눈치를 엄청 봤고, 그 전에는 자기 친구와 나를 보며 키득대고 있었으니 아마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거나, 순수하게 내가 신기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날 놀리기 위함이었을 거다. 사실 이 사소할 수도 있는 일이 이 글을 적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이렇게 문득 문득 남들 눈에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 자각하게 될 때가 있다. 맞아, 나 다른 나라에서 왔지-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 그것도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는 런던에 있더라도 내가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일에 기분이 픽하고 상해버리고 만다.


언젠가 동네 펍에서 맥주를 한잔 하고 있을 때였다. 대낮이었지만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카페 대신 택한 장소였다. 한참 뭘 적고 있는데 옆 사람이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봤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는 꽤나 길어졌고, 중간 쯤에 그 사람이 칭찬을 한답시고 말을 꺼냈다. '너한테 처음 말 걸었을 때, 사실 너 영어 하는 거 듣고 좀 놀랐어'하며. 내가 왜냐고 물어보자, 그 사람은 다른 아시아인들이 하는 영어에 비해 내가 알아 듣기 쉬운 악센트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이건 사실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거니까라고 스스로 끄덕이며 넘어가려고 했다.


언제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우리 가게가 아닌 다른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들 담배 피러 나간 사이에 한 남자가 나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는 흔한 질문도 하지 않고 맹랑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우리 다 중국여자들 엄청 좋아해!'라는 말을 뱉었다. 일단 나는 중국인이 아니며, 이 사람이 '우리'라고 묶어 말한 그 집단의 정체에 대해서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우리 영국인들? 혹은 우리 서양 남자들로 해석해야하나? 아니면 그냥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남녀 전부? 그렇다면 그 '우리'라는 범주에 아시아 사람들은 들어갈까?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말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와 당신네들을 구분지어 말하고 있었다. '나'와 '아시아인인 너'.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차라리 '우리 다 너 같은 스타일 좋아해'라는 칭찬을 들었으면 나았겠다. 아니면 '나 네가 마음에 들어'라고 해줬으면 나 예쁜가보다 하고 깔깔 웃고 넘어갔을텐데. 이 사람 말을 듣고는 '아시아 여자들이면(이 사람은 아시아인 전부를 중국인으로 칭하는 것 같았다만) 전부 좋아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추근거림은 약과다. 불과 몇 주 전에는 집에 가는 길에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5명 무리의 남자들에게 '헤이, 섹시 차이니즈걸!'하는 조롱을 들은 적이 있다. 개 중 한 명은 내 집 앞까지 날 졸졸 쫓아와서 말을 걸었고, 팔을 붙잡으려고도 했다. 사실 런던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저렇게 남자들이 조롱하는 순간 기분 나쁜 걸 참지 못하고 한 번 흘끗 째려본 건 사실이지만, 큰 길을 건너는데도 길 건너서까지 따라오다니, 참지 못하고 기분 나쁜 티를 낸 내가 원망스러웠다. 말이 통한다는 걸 알면 끝까지 쫓아올 것 같았기 때문에 난 그 상황에서 영어를 아예 못하는 척 했다. 그 남자는 내가 조롱에 계속 갸우뚱하며 걸음을 서두르자 고맙게도 중간에 포기하고 사라져줬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는데, 과연 이 사람들이 내가 아시아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날 쫓아오고, 심하게 조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인성에 누구인들 가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들이 '차이니즈걸'이라고 날 부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은 맴돌지 않았을 거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호스텔에서였나. 호스텔 공용 공간에서 다른 나라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그래서 저녁 내 수다 삼매경이 벌어졌다. 그때 한 친구가 나에게 웃으며 너는 다른 아시아 애들과는 다른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분위기가 싸해졌고, 그 친구는 그걸 무마하려는 듯 나는 부끄러움 타는 게 없다며(이 친구는 그걸 shy하지 않다고 표현했다) , 나의 성격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성격이 활발하면 활발한 거지, 거기에 굳이 '다른 아시아인들과는 다르게'라는 말을 붙여야하나 싶어 사실 마음이 삐죽삐죽해졌었다.


난 영국 체류 중에 실제로 핸드폰을 도난 당해서 새로 사야만 했다. 내가 도난 당한 이유를 내가 아시아인이라서라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그건 그냥 부주의했던 그 당시의 나를 탓할 따름이다. 하지만 핸드폰을 사러 여기 저기 발품 다닐 때 한 친구가 '조는 아시아인이라 돈 많을걸~' 했던 농담은 조금 불편했다. 언제인가 보통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인 하면 부유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말을 들었었다. 이 농담도 그런 선입견에서 나온 거였을테니까. 나는 주에 5일 일해가며 월급을 받는 가난한 워홀러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주일 쯤 전, 리카르도의 송별회를 위해 런던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다. 한 노숙자가 다짜고짜 나에게 다가와 '곤니찌와, give me some change'하고 말을 걸었다. 사실 난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니하오, 곤니찌와 정도는 내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모르던 손님들에게도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인사니까. 그래서 나는 가볍게 잔돈 가진 게 없다며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때 옆에 있던 리카르도가 그 노숙자에게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인종주의자냐며, 넌 얘가 일본인이라고 어떻게 확신하고 그렇게 대뜸 인사를 하냐며 말이다. 그 노숙자는 우물쭈물하다 사라졌지만 분노를 삭히지 못한 리카르도가 다른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토로했고, 다른 친구들 모두 기겁을 했다. 와중에 내가 이런 일은 너무 흔해서 화조차 안난다고 하자, 다들 너무나도 놀랐고, 이런 일을 그렇게 자주 겪는지 몰랐다며 날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때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느꼈던 기분나쁨이 단순히 내가 예민해서만은 아님을, 그리고 좀 더 예민해져도 되는 문제임을.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 개인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인종이나 국가에 씌어진 편견이 우선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 모든 인종적인 문제를 떠나 누군가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으면 말 한 이를 비판할 일이지 상처받은 이에게 '네가 예민하다'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가끔 '이게 인종차별인지 모르겠다'고 갸우뚱거리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게 한국인이든, 어디에서 온 누구든 말이다. 지금은 그들에게 그냥 말해주고 싶다. '네가 불편했으면, 불편했다고 말해!'하고. 그렇게 불편해한 만큼 다른 나라 사람을 대할 때 자기가 조금 더 조심하고 주의하면 될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명 가지각색의 편견들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런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나도 불편하니 남들도 불편할 거야, 하고 뼈저리게 느끼게 된 건 사실이다.


사실 나는 방금도 앞서 언급한 '하이, 차이니즈걸' 하고 인사했다던 10대 남자애에게 '모든 아시아인이 중국인일거라고 단정짓지마'하고 앙칼지게 말하고 집에 온 길이다. 내가 공격적으로 나오자 조금 당황하던 이들이 앞으로 다른 아시아 여자들에게 덜 그러게 될까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런 일에 조금 더 예민해지고, 큰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얘들처럼 길 가다 '안녕 웨스턴 가이~'하고 대뜸 외치지는 않을 거라는 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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