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칸
5월 중순에 칸 영화제? 내가 좋아하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심사위원장? 생각해보니 나 지금 런던에 있네? 비행기 표가 얼마지? 30파운드?
가야겠다 칸!
단순한 물음표가 꼬리를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비행기표를 덥석 구매해 오게 된 칸.
그렇다고 내가 칸으로 바로 향한 건 아니다. 칸에는 공항이 없다. 그리고 칸과 가까운 도시 중 공항이 있는 곳은 '니스', 휴양지로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도시다. 칸에는 사실 나 같은 학생이 마음 놓고 묵을 수 있는 저렴한 호스텔도 없었다. 아니면 내가 못 찾았거나, 영화제 기간이라 예약이 다 찬 거겠지. 어쨌든 그런 까닭에 나는 니스를 거점으로 잡고 칸을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니스에는 내가 숙소를 예약하던 한 달 남짓 전에도 호스텔 빈자리가 많았다. 니스와 칸은 기차로 약 30분. 버스로 가도 1시간 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로 꽤나 가깝고, 기차 왕복 값이 10유로 남짓에 버스는 훨씬 더 쌀 테니 칸을 가기 위해 니스를 거점으로 잡은 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5월 17일, 칸 영화제 개막식, 아침 일찍 칸에 도착했다. 해가 아직 중천에 있지 않아 날은 선선한 정도, 바다 너머 지평선에도 해 색깔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이른 시각이었다. 아침 7시도 안되었을 즈음.
내가 이렇게 일찍 칸으로 온 이유는 한 가지. 일반인도 살 수 있는 영화티켓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칸 영화제는 기자, 영화계 종사자 등 초청받은 사람들만 영화 상영이 가능한 일명 '초대받은 자들을 위한 영화제'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는 일반인으로서 영화제 행사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가 있었다. 개막식 날을 제외하고 매일 밤 해변에서 열리는 '프리 스크리닝'을 노리든가, 'Director's forthnight' 티켓을 구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들. 첫 번째 방법은 따로 티켓이 필요 없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으나, 나는 직접 칸의 영화관에서 직접 영화를 보고 싶은 욕심이 나 개막식 날 일찍부터 길을 나선 거였다. 개막식 당일 아침 10시에 부스가 열리고 티켓이 풀릴 예정이었기 때문.
나는 호스텔에서 만난 싱가포르 여자애 캐시와 함께였다. 20살의 똘똘한 친구였는데, 우연히 호스텔 같은 방을 묵게 되어 얘기를 나누다 서로 칸 영화제를 가려는 게 니스를 온 목적이라는 걸 발견해서 함께하게 됐다. 아마 캐시가 없었다면 게을러서 난 이렇게 부지런히 호스텔을 나설 수 없었을 거다.
아무리 티켓이 매진될까 겁났다고 해도 그렇지, 10시에 풀리는 티켓을 7시부터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좀 과했나 보다. 9시까지는 우리 말고 사람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Director's forthnight'이 열리는 극장은 수용 인원이 어마어마해서 조금 늑장을 부렸어도 됐겠다-싶다.
어쨌든 캐시와 나는 표를 사고는 기진맥진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도 있겠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해 때문이 더 컸던 것 같다. 티켓을 사고 대충 끼니를 때우니 11시쯤, 개막식이 시작하는 7시까지는 아직 8시간이 남았다. 그전까지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페스티벌 칸느'가 아닌, '칸'이라는 도시 자체에 눈을 돌려보기로 했다.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칸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따뜻한 느낌을 가지 도시였다.
메인 무대가 설치된 곳, 레드카펫이 깔린 해변 근처에서 벗어나 칸을 구석구석 누비다 보면 금세 북적이는 인파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칸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한적한 골목, 이런 골목들은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있을 거다. 심지어는 영화제 기간인 지금도 마찬가지. 저 뒤에서 파울로 코엘료, 윌 스미스, 마리옹 꼬띠아르, 심지어는 박찬욱이 셔터 세례에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지만, 이곳 칸 주민들의 삶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매일 열리는 듯한 작은 시장, 도시와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벚꽃, 그 벚꽃 화분이 놓인 테이블, 문을 수리하고 있던 수리공, 바다에서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멈추지 않고 태닝을 하던 사람들까지. 영화제를 떼놓고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풍경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제 때문에 도시가 그렇게 붐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내가 런던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런던의 센트럴은 언제나 붐빈다.) 아, 그래도 하나 꼽으라면 꼽을 수 있겠다. 바로 개막식에 입장하던 연예인들을 보러 모두가 레드카펫 근처로 몰려들었을 때. 그때는 '와 사람 진짜 많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유명인사들의 입장을 보기 위해서도 실컷 고생을 해야 했는데, 스타들이 차를 타고 내리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카펫과 마주 보는 펜스 자리는 낮부터 사람들이 자리를 꼿꼿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여기에 왜 사람들이 안 떠나고 이렇게 몰려있나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걸 나중에 발견했다. 나와 캐시는 각자 잠깐 떨어져서 도시를 구경하며 쉬다가 5시쯤 만나 프레스석 뒤편으로 있는 펜스에 붙었는데, 여기는 사실 기자들을 위해 설치된 단상이 꽤나 높기 때문에 카펫이 거의 안 보였다. 그래도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며 한 번 씩 뒤돌아보고 웃어주는 연예인들은 꽤나 가까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첫날 개막식에 참석한 많은 스타들을 봤지만 사실 어색해하며 계단을 오르는 박찬욱 감독님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이 심사위원장인 페드로 알모도 바르, 개중에서도 가장 청중들의 호응을 많이 받았던 윌 스미스와 함께 나란히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벅차서,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들리지도 않을 '박찬욱!'을 육성으로 외쳐댔다.
둘째 날도 역시 아침 일찍 시작하는 'Let the sunshine in'을 보기 위해 해가 정말 뜨기 전에 길을 나섰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7시쯤 칸에 도착, 캐시와 여유롭게 문을 연 카페에서 크로와상과 커피를 마셨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영화를 보다 졸지 않으려면 커피는 필수, 실제로 커피 덕에 졸지 않고 영화를 봤다.
'Director's forth night'이 진행되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조금 여유를 부려서 그런지 우리 앞에 줄이 꽤나 길다. 하지만 극장 수용 인원이 엄청나니까, 우리는 계속 '괜찮을 거야' 다독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결국 입장에 성공했다.
이 행사 티켓은 영화별로 한정된 게 아니라 티켓만 있으면 어느 영화든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어서 혹시 사람이 꽉 차서 입장하지 못하면 하고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영화관 한가운데에 꽤나 괜찮은 자리에 착석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옆에서 울렸던 어떤 여자분의 벨소리를 제외하고는, 놀랍도록 좋은 영화 관람 매너에 새삼 놀랐다.
캐시와 나는 그 뒤에 하는 'Lebanon Factory'라는 단편 영화들까지 감상하고 칸을 나서 다시 니스로 향했다.
사실 칸은 '국제 영화제'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비 불어권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첫 번째 영화 뒤에 이어지는 Q&A 뒤에는 통역이 없어서 캐시와 내가 멀뚱이 서로를 바라보다 나가자는 손짓을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영화 시작 전 안내말을 제외하고는 영화제 관계자가 영어로 뭔가를 설명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그런 불편함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칸에 있는 동안 즐거웠다. 레드 카펫 앞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잠깐 짬을 내서 간 해변에서 함께 물장구를 치고, 영화를 보며 웃고 느끼는 데 있어서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칸, 초대받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