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시간

Café Landtmann 카페 란트만

by 장성혁

오페라 하우스를 뒤로하고 링슈트라세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면, 빈은 도시가 준비해 둔 장면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모차르트의 동상이 지나가고, 호프부르크 신왕궁과 영웅광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길 건너편에는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 사이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광장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이 길에서는 걷는다는 것마저도 관람처럼 느껴진다. 무대 위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관객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자꾸 고개를 들게 된다.


처음 빈에 와서 이 길을 걸었을 때, 나는 이유 없이 발걸음을 늦추게 되었다. 보고 싶었던 장소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지자, 반가움보다 먼저 압도감이 밀려왔다. 책과 사진, 지도 속에서만 보아왔던 장면들이 실제의 크기와 거리로 다가오자, 생각이 따라가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선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고개는 자주 들렸다. 링슈트라세를 따라 걷는 일은 이동이라기보다, 종이 위에 있던 장면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경험에 가까웠다.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보다, 이미 그 장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감각이 더 또렷했다.


시청사와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몸이 먼저 지쳐 있었다. 너무 많은 장면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오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디엔가 잠시 물러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에 없던 선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청사 맞은편에 자리한 카페 란트만 쪽으로 시선이 멈췄다. 기념비와 제국의 상징들로 가득 찬 길 위에서, 란트만은 처음으로 이 도시가 “잠시 무대에서 내려와도 된다”고 말해주는 장소처럼 보였다.

카페 란트만 전경(출처: 카페 란트만 홈페이지)

테라스 쪽, 카페 건물 바로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문을 등지고 바깥을 바라보면, 란트만은 거리 한가운데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내 깊숙한 곳도 아니다. 시야는 자연스럽게 시청사와 부르크 극장 쪽으로 열린다. 국회의사당은 그보다 조금 뒤편에서, 배경처럼 시야에 걸린다. 걷고 있을 때는 모두 같은 ‘명소’였던 것들이, 앉아 있는 순간부터 서로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이렇게 앉아 있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이 자리는 무언가를 보기 좋은 자리라기보다, 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기 좋은 자리라는 것을. 시청사와 극장은 여전히 눈앞에 있지만, 더 이상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장면이 아니라 소음으로 흘러가고, 중심에 있었던 것들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밀려난다. 대신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또렷해진다.


란트만의 테라스는 그래서 무대가 아니다. 여기서는 말이 곧바로 공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생각도 즉시 발표를 요구받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의 공간, 조명이 켜지기 직전의 시간에 가깝다. 누군가는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을 굴리고, 누군가는 이미 한 말을 다시 되돌려 본다. 란트만은 언제나 앞에 놓인 무대보다, 그 무대로 들어가기 전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쪽에 더 가까운 공간이다.

란트만의 테라스와 빈 시청사(출처: 구글 검색)
란트만에서 보이는 부르크 극장(출처: 구글 검색)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아직 역할을 입지 않는다. 정치인은 정치인이 되기 전의 말투로, 지식인은 문장이 되기 전의 생각으로 앉아 있다. 말은 이곳에서 시험처럼 오가고, 생각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머문다. 마주 보이는 부르크 극장을 떠올리면 이 장면은 더 분명해진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대사를 완성된 언어로 건네기 전, 백스테이지에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낮은 목소리로 되뇌는 순간처럼. 란트만은 그런 연습의 시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여기서 말은 아직 공연이 아니다. 발음이 조금 어긋나도 괜찮고,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문장을 고치고, 누군가는 말을 삼킨 채 잠시 멈춘다. 그렇게 조율된 언어와 생각만이 각자의 무대로 나아간다. 란트만의 테이블 위에 남는 것은 완성된 대사가 아니라, 무대에 오르기 전의 말들이 남긴 흔적이다.

란트만이 문을 연 것은 1873년, 링슈트라세가 막 도시의 윤곽을 갖추던 시기였다. 빈은 제국의 수도로서 자신을 전면에 배치하기 시작했고, 시청사와 국회의사당, 극장과 박물관이 차례로 도시의 얼굴이 되었다. 모두가 앞을 향해 말해야 했던 시대였지만, 모든 말이 곧바로 공적인 언어가 될 필요는 없었다. 란트만은 그런 도시의 구조 속에서, 무대에 오르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이 카페는 처음부터 중심을 점유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와 예술, 행정과 일상이 교차하는 경계에 놓이며, 사람들이 역할을 입기 전의 상태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결정보다 조율이 먼저 이루어졌다. 공식 회의나 연단으로 가기 전, 이미 정해진 문장을 다시 한 번 낮은 목소리로 굴려보는 시간. 란트만의 테이블 위를 오간 것은 정책 그 자체라기보다, 정책이 어떤 어조와 형식으로 세상에 나갈 것인가에 대한 준비였다.


이 성격은 비교적 최근의 장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2003년, 카페 란트만에서 수십 년간 일해 온 웨이터 로베르트 뵈크(Robert Böck)의 은퇴 자리에서 당시 빈 시장 미하엘 호이플(Michael Häupl)이 직접 커피 한 잔을 건넸다. 형식만 놓고 보면 작은 제스처였지만, 이 카페가 어떤 공간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왼쪽 : 로베르트 뵈크(Robert Böck), 오른쪽 : 미하엘 호이플(Michael Häupl)

그날 란트만에서는 평소의 역할이 잠시 느슨해졌다. 늘 커피를 내오던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늘 말하고 결정하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잔을 들었다. 이는 위계의 전복이라기보다, 역할이 무대에서 내려와 잠시 벗겨진 장면에 가까웠다. 공식적인 의전이 필요한 공간이었다면 어색했을 이 동작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란트만이 어떤 공간인지를 설명하는 데, 그날 조용히 건네진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

이런 공간에 익숙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도 있었다. 그가 란트만을 자주 찾았다는 사실은, 이 카페가 어떤 종류의 시간을 허용해 왔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이미 발화된 말이 아니라, 말해지기 직전의 충동과 망설임. 드러난 사고가 아니라, 아직 의식 위로 올라오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 그런 관심사는 연단보다, 이런 테이블에 더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런 성격 때문에 그는, 빈이라는 거대한 연극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난 이곳을 자주 찾았을 것이다.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잔을 내려놓는 소리도 크지 않다. 이 자리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표시를 굳이 남길 필요는 없다. 란트만에서는 충분히 앉아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몸에 남는다.


테라스를 벗어나기 전,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다. 시청사와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인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이 자리만큼은, 무대 뒤를 잠시 들여다본 사람만이 아는 온도를 품고 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빈의 백스테이지를 살짝 훔쳐본 기분으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막이 오르기 전의 공기는 오래 남는다. 란트만은 그렇게, 보여주지 않는 장면을 건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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