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를 들으며
아래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에서 전한 축사의 일부다.
"우리가 80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3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3분의 1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3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중략)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 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6분 남짓한 연설은 전율의 연속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내 머리를 치며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고뇌하게 된 문장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온갖 폭력을 이겨 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들 속, 무수한 사건들에 치여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먼 옛날의 나, 지금 여기의 나, 그리고 먼 훗날의 나'라는 소중한 세 명으로 이루어진 내 인생의 연속성을 잃을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의 일생을 입학과 졸업, 취업과 창업, 결혼과 육아, 승진과 노후준비 순으로 정의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생애주기별 역할들을 해내기 위해 우리는 늘 경쟁하고 비교하고, 치열해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남들과는 차이 나게, 특별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점에서 모두에게 평등하다.
나 또한 지금껏 여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치열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전 진짜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그래서 후회되는게 없어요."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녔을 정도로.
그런데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 지니고 있어야 할 철학, 중심 가치를 가지고 하루를 온전히 살아냈어야 했는데,
그냥 매 순간 역할해내기, 주어진 숙제 헤쳐나가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잠시 지난 과거와 현재를 차분히 가다듬으며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서른넷.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너무 젊고 어리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비교, 의미와 무의미라는 포장지에 싸여진 온갖 폭력들에 치여 정신을 놓지 않고,
내 인생 끝에서 나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를
아무런 후회와 미련 없이, 아쉬움 없이 맞이하러 가기 위해
이제부터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살아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