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이의 풀수 없는 갈등들
네이버 사전에 나온 설명이다. 'memory foam'은 우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신체 부위에 전달되는 위험한 하중을 흡수하고 원상회복할 수 있는 첨단소재로 NASA의 과학자가 개발한 첨단소재를 말하는데 요게 요즘 나오는 베개 신소재이다. 자고 나면 목 뒤가 자주 뭉쳐 좋은 베개를 장만하리라 마음먹은 지 오래다. 검색해 보니 가격이 천차만별, 소재 또한 다양해 사서 베고 자 보지 않고는 어떻다 말할 수 없는 세계다. 기준은 하나다. 호텔방 풀 먹인 듯 사각거리는 베개 같은 푹신함과 편안함을 주는 베개. 거위털 베개와 memory foam 베개를 하나씩 샀다.
소설가 김중혁은 '작가의 루틴'에서 'memory foam'을 '기억 물거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베개를 머리로 눌렀더니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고야 말아서 베개에 눌러놓은 그 기억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 생각하면서 아마도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라면 제법 부러운 구석을 가진 녀석이라고 쓰고 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다' '충격과 자극을 받아도 빠르게 원래 평온한 상태로 돌아온다'
인간이 기억을 뇌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기록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마음을 놓았다가는 언제든 위험에 노출되고 만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툭, 툭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잠시 방심하면 훅하고 '공격해 온다'면 좋은 기억으로 그 사람을 저장할 수 없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순식간에 훅하고 공격에 대비해야 상처받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기록에 차곡차곡 데이터가 쌓이면 어느 순간 판단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크리슈나무르티는 '갈등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아주 파괴적이거든요.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아내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취미, 잔소리, 성질 급한 거, 질투하는 것. 그런 것들이 그녀에 대한 내 지식이 되는 것이지요. 걸음걸이, 머리 모양, 몸의 습관들까지 다 나의 지식이 됩니다. 그녀에 대한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모아 놓습니다. 과거의 일로써 말이지요."
베개는 첨단 '메모리 폼'으로 강한 충격과 하중도 95% 이상 흡수해 원상회복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가장 회복력이 떨어지는 메모리 폼이다. 한번 저장된 나쁜 기억은 좀처럼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의 memory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갈등은 뇌에 저장된 기억 때문에 시작되고 그 기억을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일어난다.
친한 친구 언니가 60세가 됐는데 치매를 오래 앓고 있다. 친정아버지가 언니를 돌보면서 함께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언니에게 화를 내고 심할 때는 때리기도 한다는 거다. 언니 병을 돌보기 위해 한 달여 함께 살면서 언니를 막 대하는 아버지가 너무 밉고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젊었을 때 엄마에게 가족을 맡기고 혼자 하고 싶은 일 하고 다닌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있다. 자신 같으면 그런 아버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을 텐데 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금 일어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밥 먹을 때 아버지에게 같이 먹자고 살갑게 말을 건넨다. 언니 행동을 보면서 기억이 지워지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자신은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온통 꽉 차, 몽땅 지워버리고 다시 초기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괴로운데 언니는 매일, 매 순간 메모리 폼처럼 기억을 초기화한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언니는 그렇게 해맑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어쩌면 병에 걸리지 않은 아버지와 자신이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더라는 발견이었다. 인간의 기억이 고통을 만든다.
가장 가까운 사이는 기억의 원산지라 할 수 있다. 나쁜 기억 같은 건 머리에서 몽땅 지워 버리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쉽지 않다. 멀쩡하게 평온하다가 어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기억이 살아난다.
휴가 동안 집이 너무 더우니까 밥을 할 생각도 못하겠다. 남편이랑 친정 부모님 댁에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다. 장마가 이어져 세차를 하지 못한 남편은 천 원 지폐가 있는지 물은 뒤 세차장으로 차를 몬다. 8월 첫 주 더위가 정점을 찍는 기간 동안 세차장은 수리 중이다. "아차, 수리 중이네. 이런" 아쉬워하길래 시간도 남고 하니 다른 세차장 가서 세차하고 갈까? 했더니 난데없는 짜증이 날아온다. "당신은 어떻게 된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 생각이. 내가 다른 세차장 갈 줄 몰라 이러는 것 같아?" 순간 정신이 멍하다. 무방비 상태에 훅하고 들어온 날카로운 잽에 휘청거려 중심을 잃을 정도다. 내 뇌 기억 메모리 폼이 푹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원 상태로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매 순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해 보는 것. 내가 안다는 사실을 내려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대를 안다고 장담한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도, 그가 생각하는 나도. 인간의 기억은 그래서 믿을게 못된다. 겸손은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는 자세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