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지 마세요, 거기쯤에서 말해요

배우는 사람들 17

by 함께걷는제제


연극 수업에 한 여성이 들어왔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한 선을 말했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 주세요.”

“몸이 닿는 것도 안 됩니다.”

눈길도 오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한 걸음, 아니 두 걸음쯤 거리를 두었습니다.


연극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서로의 호흡을 느끼고, 때로는 손을 잡고, 감정을 부딪치기도 합니다.
강사는 그런 훈련을 통해 스스로의 틀을 깨 보는 연습을 첫 시간에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부딪침’은 연극의 과정이 아니라, 견뎌야 할 일이었습니다.


첫 시간부터 어떻게 수업을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답을 그분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연극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강사님은 가까이 가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극 수업은 기존의 세부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그분에게는 손을 잡는 대신 시선만 나누었습니다.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워하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대사를 했습니다.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대사를 나누고 연기를 했고 연극을 완성시켜 갔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동작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경계일 수 있습니다.

그 선을 넘게 하는 것이 배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평생교육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에는 오랫동안 어두운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요.


태어남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기억,
가정 안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시간,
결혼 이후에도 억압 속에 머물러야 했던 날들.


사람의 몸은 기억을 합니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몸이 먼저 거리를 만들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가까움’은 친밀함이 아니라 위협을 담은 다가옴이었다고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수업을 이어가는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기다리는 것,
그리고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미리 정하고, 그 선을 절대 넘지 않는 것.


학습자들은 강사님의 안내와 스스로 내보이는 가까이 오는 게 힘들다는 그분의 소리 없는 외침을 점차 이해해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라고 말해주면 그 선 안에서만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연극 수업은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는 배움의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그분은 결국 수업을 끝까지 마쳤습니다. 연극 한 편을 완성하는데 한 부분을 담당하며 우리들만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습니다.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학습자들은 그분이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음을 다 같이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분이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여전히 두 걸음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배움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그분이 새로운 프로그램 홍보지를 보았다면서 수업을 문의하러 오셨습니다.


여전히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말을 건넸습니다.
가까이 오지 않았고, 눈도 오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거리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스스로 선택한 거리였고,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학습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새롭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으로 개조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 스스로가 편안하게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덜 불안하게,
조금 더 안전하게,
조금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그분은 여전히 소리 없이 말합니다.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거기쯤에서 말해요.'


이제는 그 말이 거절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이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고, 배움을 이어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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