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사람들 16
오늘 한 모임에서 북한이탈주민 작가의 책을 단체로 구매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북에서 나오면서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셨다는데 그분의 삶이 팍팍한 상황을 전해 듣고 책 한 권을 사주는 것으로라도 돕자는 취지였습니다. 북에서 오신 작가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고마운 표시로 책값을 반값만 받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어렵게 우리나라에 오셨을 텐데 글을 쓰신다니 그분을 돕고 싶다는 이웃들의 정성이 닿아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한 분의 학습자가 떠올랐습니다.
영어 읽기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쓰인 간판과 상품을 잘 읽어서 생활에 불편함을 줄이자는 취지로 개설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분은 첫날부터 쉽게 곁을 주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출석부에 이름이 노출되는 것도 불편해하셨고, 늘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맨 뒷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래도 영어수업이라 수강생들은 마음에 드는 영어이름을 짓느라 부산했는데 그분은 명찰에 그냥 본인이름을 써 놓으셨더군요.
처음에는 강사님께서도 다가가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했습니다. 평생학습에는 남성 수강생도 적은 편이고
본인이 꺼리는 것 같으니 괜히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거리 두기를 존중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이 간판은 어떻게 읽나요?”
그 남성 학습자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강사님께서는 매시간마다 본인이 못 읽겠는 간판이나 상품을 사진으로 찍어오거나 단체 알림방에 올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누구보다도 열심히 특유의 억양이 느껴지는 말투로 삶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영어를 질문하셨습니다. 강사님께서 음가를 알려드리면 소리 내어 읽는 모습도 꽤 진지했습니다.
“네, 아주 잘 읽으셨습니다.”
강사님께서 말씀하시면,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며 다시 수업에 집중하셨습니다.
간판 영어와 상표 영어를 읽기에 그분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참여하셨습니다.
말수는 적었지만, 배우려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또렷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북에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3만 명가량의 북한이탈주민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숫자 안에는 각자의 사연과 긴 시간을 견뎌낸 삶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름이 불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이유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계셨던 모습이 조금은 이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배우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건 왜 이렇게 읽나요?”
작은 질문 하나에 담긴 용기와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평생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분의 성실함과 용기는 오히려 제게 더 큰 배움을 남겼습니다.
성인학습자는 각자의 속도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 속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들었던 단체 책 구매 이야기도, 그 기다림과 응원의 또 다른 방식일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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