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울어버린 날
일어났다. 날씨도 좋았고, 몸도 가벼웠다. 기분도 좋았다. 오늘은 드디어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푸에르토 이과수로 가기 전에 왠지 밥을 두둑이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얼른 짐을 싸놓고 식당으로 갔다. 큰 호스텔이다 보니 뷔페식처럼 조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한 접시 담아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소금 후추통에 기대어 이제 오후가 되었을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평소처럼 누워서 일일 드라마를 보고 있던 우리 엄마는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평소에는 영상통화는 커녕 전화가 와도 빨리 끊으려고 하는 그닥 친절하지 않는 딸이라서 그런가 보다.
엄마가 이제 배는 괜찮은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잠을 잘 잤는지 물어보면서 보고 싶다며 갑자기 울먹인다. 처음에는 ‘찐’으로 당황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괜히 웃으면서 엄마에게 왜 울고 난리냐며 수저를 떨어뜨린 척 눈물을 닦았는데 갑자기 어제 본 폭포수처럼 막 떨어지길래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딸, 전화가 끊겼어.’라고 카톡이 와서 여긴 아이티 강국이 아니라며 와이파이가 약해서 끊겼다고 아주 티 나는 핑계를 대고 카톡만 했다. 그리고 눈물의 빵을 먹었다. 거참, 엄마는 왜 울고 난리래 라며 혼자 훌쩍이면서 먹었던 스크램블 에그.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다. 누가 보면 일하러 먼 타지까지 와서 고생하는 사람인 줄 알겠다.
밥 먹기 전까진 홀가분 한 아침을 맞이해서 너무 신이 났는데 갑자기 뒤숭숭해졌다. 그래도 갈 길은 가야지! 오늘은 푸에르토 이과수를 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한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하루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큰 배낭과 서브 배낭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푸에르토 이과수, 아르헨티나행 버스에 올라 또 한 번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아침이라 자리가 여유롭여 바로 앉았다. 그리고 나의 첫 국경소에서 내려 여권에 두 나라의 도장을 받아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여기까진 너무나 수월했다.
원래는 버스기사가 어떤 안내를 하면(이런 내용도 알아보지도 않음) 버스를 갈아타서 이과수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알아보지도 않고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과수라고 하길래 그냥 내렸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냥 앞만 보고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뙤약볕 아래를 쉼 없이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뭐에 홀린 듯 그냥 생각 없이 내렸던 것 같다. 한 시간을 걸었을까, 아무리 걸어도 물 한 방울, 그리고 이슬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Puerto iguazu?라고 하면 맞다고 하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영어로 말하면 못 알아듣고, 푸에르토 이과수라고 하면 알 수 없는 스페인어만 귀로 꽂히는 이 답답함은 정말 너무 힘이 들었다. 심지어 로컬 사람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Puerto iguazu ^.^ 라고 하는데 울고 싶었다.
다시 내가 내렸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길 건너 정류장에 왠지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 다가가 이과수 갈 건데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여기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Oh, my god,,!
하루 반나절을 배낭을 들쳐 매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이과수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시간이 많이 없었다. 나는 오늘 오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입장권을 사서 열차를 탔다. 푸에르토 이과수는 넓기도 넓고, 관광 포인트가 정말 많아서 하루를 꼬박 머물러도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볼 것도 많고, 사진 찍을 것도 많다던 푸에르토 이과수. 나는 악마의 목구멍만 보고 와서 할 얘기가 없다. 그래도 그 유명한 악마의 목구멍을 본 것이 어디인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도 엄청난 운이다. 심지어 이 무시무시한 코로나 시국에 다시 한번 생각하면 100프로 행운이다.
가방을 내려놓으니 발걸음이 너무 가볍다. 날아갈 것 같았다. 트레인에 올라타 자연경관을 맘껏 눈에 담았다. 혼자 보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계속 엄마가 생각났다.
트레인에서 내려 산책로를 쭉 걸었다. 멀리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오후 세시반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빨라졌지만 뭐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 두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경치를 감상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그 대단하다던 악마의 목구멍!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절벽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폭포수를 그냥 가만히 계속 보게 되는 마법에 걸린 것 마냥 한참을 내려다봤다. 여기서 봐도 저기서 봐도 정말 거대했다.
약 10년 전 봤던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던 푸에르토 이과수. 개인적으로는 푸에르토 이과수가 나에겐 더 웅장했다. 여기서 사진을 안 찍으면 절대 안 된다.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어떻게 찍은 건지 파란 하늘이 검은 하늘로 변했고, 어두침침하게 찍혔다. 역광도 아니었는데,, 이 후로부터는 누군가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한 후에 무조건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하하하
한참을 폭포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중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이 와서 수줍게 코리안이냐고 묻는다. 맞다고 하니까 사진을 함께 찍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역시,, K-Culture의 힘은 대단하다. 이럴 때마다 '국뽕'이 저절로 차오른다. 추노 같은 나의 모습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외국인이 찍어준 사진을 나중에 보고 알았다) 열심히 웃으면서 찍었다. 기분이 좋다!
아침에 엄마와 통화하고 싱숭생숭했던 기분도 사라졌고, 길을 헤매어 조금 언짢았던 기분도 폭포와 함께 사라졌다.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정말 가기 싫었다.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가는 차편을 알아봤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버스회사가 많아 가격을 계속 따져봤는데 생각보다 담합이 잘 되어 있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드디어 까마를 타보다니. 남미로 오기 전부터 정말 경험하고 싶었던 눕는 버스! 기내식이 아닌 버내식도 받아서 먹을 수 있고, 담요도 주는 남미 버스들. 버스표를 사고 너무 출출해서 얼른 근처 카페로 가서 화장실도 가고 맛없는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당을 충전했다.
더위에 지쳐 멍 때리다 버스 출발 3분 전이라 부랴부랴 뛰쳐나갔다. 그때까진 몰랐다. '남. 미. 시. 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혹여 내가 놓친 것은 아닌가,, 장거리라 티켓값도 비싼데,, 어떡하지,, 라는 불안함에 버스회사 아저씨에게 물었다. 세상 편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 한참을 더 기다렸는데 안 온다. 버스 터미널 가드에게 물었다. 그도 세상 편한 웃음을 지으며 조금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 더 기다렸다. 한 시간을 기다렸더니 버스가 도착했다. 대단했다. 우리나라였으면 아마 어마어마한 컴플레인이 있을 텐데 여기는 컴플레인하는 사람들도, 초조해하는 사람들도 없다.
드디어 올라탔는데 너무나 쾌적했던 버스 안. 드디어 출발이다! 얼마 후 버스 승무원이 와서 음료와 간식을 줬다. 의자 앞에는 엔터테인먼트를 볼 수 있는 화면도 있다. 아니 정말 비행기를 그대로 옮겨놨다. 혼자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구경하고 조금 진정을 했나 싶다가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그러고는 계속 눈물이 났다.
사실 길게는 아니지만 혼자 해외여행을 세 번을 다녀왔다. 물론 장기는 아니고 단기여행으로 다녀왔다. 여행의 목적은 늘 스트레스 해소였다. 물론 남미 여행도 스트레스 해소가 맞지만 혼자 하는 첫 장기 배낭여행이었고, 이 여행 자체가 나에겐 크나큰 챌린지였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특별했다. 그래도 몇 번의 혼자 여행의 경험으로 자신 있게 남미로 왔지만 브라질에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먹지도 못했던 내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멋있고 자유로운 배낭여행자가 아니었다. 오롯이 모든 상황을 즐기면서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뜻한 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여행은 내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여행에는 변수가 매우 많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다.
남미로 떠나기 전, 절대 한국인과 만나지 않을 거며 한인 민박 근처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다녔던 나는 브라질에서 나오자마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사람이 필요했고, 대화가 필요했고, 맘 놓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문득 버스에서 '나는 혼자가 좋아, 혼자가 편해.'라고 해던 내가 외로움을 참 잘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영어도 안 통하고 늘 경계하고 다니다 보니 아직은 이 여행에 준비가 많이 안된 채 온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승차감이 좋았던 까마에 누워 계속 눈물이 났다. 중간중간 여권 검사와 가방 검사하러 올라타는 군인들은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다. 그래도 밤에 받은 버내식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벽에 조금 추웠던 첫 까마를 즐기다 잤다. 20시간이 걸려 도착한다는 버스는 20시간을 훌쩍 넘겨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꼬리뼈가 아작나는 것 같았다. 내리자마자 아저씨처럼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한번 쫙 켜고 가방을 들쳐 맸다. 쉽지 않다, 장거리 버스!
첫 한인민박, 그 유명한 남미 사랑을 찾아야 한다. 제발 좋은 인연이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