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조 아감벤의 <행간>을 읽고
몇 년 전,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든 건 단순히 제목 때문이었다. 의미를 집요하게 포획하려는 문장들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의미와 이미지, 그리고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아감벤의 글은 내게 지나치게 어려운 텍스트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 여러 번 책을 펼쳤다가 다시 덮기를 반복했고, 최근에야 겨우 책의 중반을 넘길 수 있었다.
아감벤의 <행간(Stanze)>은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욕망하는지, 그리고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 어떤 간극이 존재하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붙잡고 산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억과 이미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들의 잔상 속에서 살아간다. 아감벤은 이를 유령과도 같은 이미지라 부르며, 말로 완전히 붙잡히지 못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즉 행간에 머무는 것들에 주목한다. 그의 관심은 결국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 그러나 분명 우리의 삶을 계속 흔들고 있는 그 사이의 공간에 향해 있다.
책 속에서 아감벤은 여러 시대와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며 인간의 욕망과 이미지의 구조를 더듬는다.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혀 결국 그 이미지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나르시스의 신화, 이상적인 형상을 사랑한 나머지 조각상에 생명을 부여하게 되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현실을 잠식하는 우울의 악령들까지, 그는 다양한 신화와 사유의 전통을 끌어와 우리가 실제 대상이 아니라 그 이미지와 환영을 욕망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관심은 더욱 언어와 시,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머무는 자리로 옮겨가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현실과 부재, 말과 침묵 사이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반복해서 확인하게 만든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문득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글을 쓰며 붙잡으려 했던 것은 사건이나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렸지만 여전히 현재의 나를 떠나지 않는 어떤 이미지들이 아니었을까. 사라진 도시의 공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장면들, 이미 끝난 관계의 감정, 선택하지 않은 삶의 가능성들. 그것들은 늘 현재와 과거 사이 어딘가에 머물며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언어로 건져 올리려 애써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써온 이야기들 역시, 어쩌면 경계를 떠돌던 그 유령들을 잠시 붙잡아 두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어쩌면 예술이나 글쓰기란,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고 또 절망하는 데서 출발해, 결국 피그말리온이 되어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내가 ‘말이 닿지 않는 곳’을 의식하게 된 것은 단순히 표현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감각과 경험은 애초에 언어로 완전히 붙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감벤은 철학이 개념을 통해 세계를 포획하는 반면, 시는 말로 완전히 붙잡히지 않는 것을 그대로 남겨 두는 형식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 속에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더 오래 남고, 독자는 그 빈자리에서 각자의 기억과 이미지들을 다시 불러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행간’ 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산문을 쓰면서도 끝내 어떤 장면이나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로 남겨두려 했던 이유 역시, 그 말해지지 않는 영역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천착해 온 ‘경계’는 어쩌면 유령들이 머무는 빈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현재의 나를 떠나지 않는 존재들 말이다. 도시의 골목을 걸을 때 느끼는 시간의 폭력들, 노래로 환기되는 젊은 시절들, 내 곁을 떠난 이의 남은 이미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속삭이는 목소리들. 그것들은 늘 현실과 과거, 현재와 부재의 경계 어디쯤에 머물며 지금의 나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일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잠시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