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 풍경 속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나를 본다
교토에서의 일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10일 차의 아침이 밝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엊그제처럼 카모강으로 향했다. 단 한 번이라도, 천천히 달리며 교토의 아침을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요 며칠 교토의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습도는 높고 햇살은 따가웠다. 다만 그늘로만 들어서면 크게 덥지 않을 정도였다. 10월 초의 교토는 부산보다 약간 더웠다. 오늘은 아침부터 흐린 날씨 덕에, 엊그제보다 훨씬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달릴 수 있었다.
나는 카모강에서 달리며 느낀 게 하나 있다. 한국의 강변처럼 러닝트랙이나 자전거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보행자나 러너, 자전거 이용자 간에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
‘이곳은 모두의 공간이다’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듯했다.
오늘은 엊그제처럼 무리하지 않고 평소 달리던 5km만 완주했다. 그때 욕심을 내다 인대 통증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며, 다시 한 번 카모강 쪽으로 몸과 시선을 돌려 속으로 말했다.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또 보자, 카모강.”
그 말을 들었는지, 카모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제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 여행 일정이 될 듯했다.
10박 11일의 여정 중 마지막 날인 내일은, 오전 중 교토역에서 간사이 공항행 하루카 열차를 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처럼 샤워를 마친 뒤 숙소 공용주방에서 녹차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은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다시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고, 아직 가지 못한 곳도 있었다. 잠시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교토 북서쪽의 위치한, 아직 이번 여행에서 가보지 못했던 ‘철학의 길’이었다.
철학의 길로 향하는 길에는 어제 들렀던 츠타야 서점과 오카자키 공원이 있었다. 그곳에는 ‘헤이안 신사’라는,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신사도 있었다.
어제 플리마켓에서 맛보았던 아오모리 사과가 너무 맛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들러봤지만, 사과 장수는 없었다. 그 사과는 공원의 분위기, 완벽한 날씨, 들뜬 마음이 어우러져 더 특별했던 ‘시절인연’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본래의 목적지인 철학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잠들기 전, SNS에서 ‘벌써 연휴 끝이야?’라는 문구가 담긴 그림이 유행하던 걸 봤다.
그랬다. 긴 연휴라도 계획 없이 흘러가면, 그저 지나가 버린다. 나 역시 수없이 그런 경험을 했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더 중요한 일들이 끼어들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연휴가 끝나버린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연휴나 프로젝트를 앞두고는, ‘스스로 취소하기 어려운 장치’를 마련해두는 편이다.
예를들면 위약금처럼 말이다. 그래야 어떠한 방해가 들어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교토행 항공권을 결제한 순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만약 이번 황금연휴를 그냥 보냈다면, 나는 집에서 평소처럼 일정을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연휴 내내 비가 왔다더라. 반면 일본은 내가 도착한 초반 며칠만 빼면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날씨 덕에 사진도 잘 나왔다. 나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결국 이번 교토 여행에 후회는 없다. 10박 11일 동안 단 하루도 ‘죽은 시간’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감사하다.
나는 대부분의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손으로 까야 하는 해산물이나 귤처럼 손톱 밑에 뭔가 끼는 느낌의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여정에서도 대부분의 일본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하지만 역시 나는 한국인이다. 벌써부터 김치와 삼겹살이 그립다. 그것도 ‘타베호다이’로서 무제한, 마음껏 먹고 싶다.
일본에서도 삼겹살과 김치를 먹을 수는 있지만, 한국처럼 마음껏 배 터지게 먹으려면 꽤 비싸다. 식재료는 비슷하겠지만, 일본인들이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다 보니 비쌀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집에서 ‘삼겹살과 김치’를 무제한으로 구워 먹는 것이다. 벌써부터 먹을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건물들이 전반적으로 낮다는 걸 체감한다.
예전에 홍콩에 갔을 때는 ‘빌딩 숲’이라는 말이 실감났는데, 한국은 그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일본보다 훨씬 높다. 한국의 아파트들은 발코니도 없이 평평한 구조로 밀집되어 있다 보니, 건물 보는 재미는 덜하다.
반면 일본은 낮은 단독주택이 많아 행정력이나 소방력 같은 공공 서비스 유지비가 더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웃 간 얼굴을 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 내 커뮤니티가 사유지 기반의 ‘닫힌 커뮤니티’라면, 일본의 마을은 지역 전체가 하나의 생활권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는 ‘시군구’보다 더 작은 단위인 ‘아파트 단지’ 속에서만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조섞인 생각을 하며, 나는 철학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배가 고팠다. 철학의 길에는 식당보다 카페가 많았다.
허기진 배를 붙잡고, 식당을 찾기 위해 길 끝을 돌자, ‘긴카쿠지 마에’라는 상점가가 눈에 들어왔다.
‘긴카쿠지’라면 금각사인가? 잠시 헷갈렸지만, 그곳은 바로 은각사였다. 은각사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마밥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나름 가격도 합리적이어서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이번 여정에서 한국에 돌아가도 생각날 음식은 바로 이 ‘마밥’이다. 예전 심야식당에서 마스터가 만들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뜨거운 밥 위에 마를 얹으면 밥의 온도가 식으며, 쫀쫀한 식감이 입안을 감돈다.
돌아가면 나도 한 번 만들어볼 생각이다. 다만 요리에 워낙 재능이 없어, 잘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한동안은 한국에서도 마밥을 흉내 내보려 이것저것 시도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맛있게 마밥 식사를 마치고 잠시 고민했다.은각사의 입장료는 500엔. 이미 사찰과 신사를 많이 둘러본 탓에, 감흥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여기까지 왔잖아. 다시 오려면 시간과 돈이 들 테니까. 결국 500엔을 내고 들어갔다.
입장권은 부적 형태였다. 금각사와 같았다.
“이 두 절이 같은 종파일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은각사는 원래 은색으로 칠하려 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목조 건물의 절제된 미와 주변 자연이 어우러져 있었다. 게다가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교토 시내의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내 기준에서 은각사는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절’이었다.
나는 보통 입장 전의 풍경이 전부이거나 체류 시간이 너무 짧은 곳(예: 기요미즈데라, 금각사)은 추천하지 않는다. 여행은 결국 시간과 에너지의 선택이니까.
은각사를 나온 뒤, 1.8km 정도 이어진 철학의 길을 걸었다. 많은 외국인과 현지인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이 길을 즐기고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이 길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의 보존 요구로 1970년대에 교토시가 정비를 완료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의 탄천처럼 완전히 정비된 느낌은 아니었다. 좁은 돌길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개천 옆에 이어져 있었다.
철학의 길은 특히 봄에 유명하다고 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3월 말이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초가을의 교토였지만, 나는 이미 그 길의 봄과 가을을 동시에 상상할 수 있었다.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돌아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 일정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기온 거리와 기요미즈데라는 어제 다녀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세이 보강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카메라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저녁은 카모강에서 보내기로 했다. 오늘의 시작도, 오늘의 끝도 카모강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 명소를 찾아볼까 했지만, 숙소 근처에는 마땅치 않았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저 사람들 사이에 앉았다.
카모강 주변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는 이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아 마지막 해를 함께 바라보는 나.
하늘은 연한 파랑에서 점차 짙은 곤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휴대폰 음악 앱을 켜, 평소 듣지 않던 J-Pop을 틀었다. 카모강변을 걷는 일본의 노을 속에서 듣는 일본 노래. 이보다 자연스러운 조합이 있을까.
흥얼거리며 가사를 따라 부르다 문득 생각했다.
“이게 여행이지.”
교토의 하늘 아래, 낯선 사람들과 같은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 감정. 그거면 충분히 행복했다
그렇게, 이번 여정의 마지막 해는 천천히 저물어갔다.
急がなくても、ちゃんと時は進んでいる。"서두르지 않아도, 시간은 분명히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