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머물고, 남겨두고 온 시간들
사실 일본에서 더이상 빨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 숙소에서 한 번 세탁을 했기에, 세탁이 필요한 옷들만 따로 모아두고 한국에 돌아가서 몰아서 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 나는 김에 미루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집 세탁기는 이미 가족들의 빨래로 쉴 틈이 없을 테니까.
여정 10일차 였었던 어제, 200엔을 넣고 세탁기를 돌린 뒤, 100엔을 추가해 30분 동안 건조기를 돌렸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원래 건조는 1시간 반은 돌아야 완전히 마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말리기 위해, 한 번도 올라가 본 적 없던 숙소의 3층 옥상으로 향했다. 따사로운 교토의 햇살 아래 빨래를 널며, 나는 이 마지막 날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11일 차 아침, 체크아웃 전 빨래를 수거하러 다시 옥상에 올랐다. 교토의 습도 탓인지 완전히 바싹 마른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빨래를 모두 걷은 뒤, 잠시 멍하니 옥상 난간에 서서 교토의 일상을 내려다봤다. 고요했다. 앞에는 고층 건물 하나 없이,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이제 돌아가는구나.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참 많지만, 너도 고마웠다. 교토의 햇살아.”
그렇게 교토의햇살을 머금은 빨래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세면을 마쳐도 공항행 열차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때서야 문득 떠올랐다.
한국으로 복귀한 다음날, 일본어 능력시험 대비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행 중에도 단어장을 들춰보거나, 이동 중에 웹사전을 찾아보곤 했지만 정작 숙제는 손도 대지 않았다. 황금연휴를 맞아 놀기만 할 학생들을 염려했는지, 이번 주 숙제는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단어 시험에, 문자어휘 문제, 듣기 문제까지. 단어와 문자어휘 문제는 어찌저찌 풀 수 있었지만, 듣기에서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와서 오히려 일본어가 더 안 들렸다.
한국에서는 매일 듣던 일본 뉴스가 익숙했는데, 교토에서는 대화라고 해봐야 식당 점원이나 버스 안내방송뿐이었다. 그렇게 익숙했던 언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현실로 돌아간다는 건 이런 거겠지.’
여행 동안 미뤄둔 것들이, 이제는 다시 내 일상 속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의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틈틈이 기록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완료했다.
4박 5일간 지냈던 낡은 다다미방. 알고 보니 1인실도 남아 있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넓은 방을 혼자 써보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호스트에게 일본어로 메시지를 남겼다.
“체크아웃했습니다. 열쇠는 바구니에 넣어두었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첫날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사쿠라상에게 작별 인사를 못한 게 아쉬웠지만, 인연이라면 또 언젠가 마주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하며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교토역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떠나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캐리어로 통로가 막혀 현지인들은 티 나지 않게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나 또한 그 관광객 중 한 명이었다. 15분쯤 달려 교토역에 도착했다.
처음 교토 외곽으로 향하던 날 이후, 다시 찾은 그곳. 이번엔 도착이 아닌 ‘출발’을 위해 서 있었다.
가는 자가 있으면 오는 자가 있는 법. 방금 도착한 듯한 여행객들이 교토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10일 전에 저랬었는데.’
그들을 보며, 나는 이제 돌아갈 준비를 했다.
“11시 30분, 교토역 31번 플랫폼, 하루카.”
전광판에 내 열차 정보가 떴다. 출발 한 시간 전, 간단히 우동 정식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런데 11시 열차가 고장으로 지연되면서, 내가 타야 할 11시 30분 열차도 영향을 받았다. 역무원들도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두 편의 승객이 한 열차에 탑승하게 되었고, 내 좌석권은 다행히 유지됐다. 열차가 도착 하여 탑승 후, 앞 시간대 승객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도 그랬겠지.’ 열차 연착은 비행기보다 낯선 일이라 더 짜증이 날 법했다.
그 순간 느꼈다. 살다 보면 이런 불공평한 일도 생기는구나. 그래서 여행에서는 늘 ‘시간의 여유’를 넉넉히 잡아야 한다는 걸.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하루카 열차. 차창 밖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3년 전, 코로나가 끝난 직후 신오사카에 홀로 처음 왔던 기억. 가족과 함께 오사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갔던 그때. 열차는 그 역들을 지나며 내게 잠깐씩 과거의 장면을 떠올릴 여유를 주었다.
짧은 정차마다,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공항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시내에 있을 때 과자를 사둘 걸 그랬다.
카메라를 늘 한 손에 들고 다녔기에 양손에 짐이 들리는 게 싫어 미뤘던 일이다. 결국 출국 당일, 아이들에게 줄 녹차 쿠키를 아직 사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공항 면세점의 과자 코너는 긴 줄로 북적였다.
나는 계산 줄에 서서, 아이들이 좋아할 녹차 쿠키와 아내가 좋아하는 일본 쿠키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바구니에 담았다. 나 혼자만 좋은 시간을 보낸 미안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장인어른께 드릴 선물로는 일본 녹차 세트를 골랐다. 사실 어른들 선물 고르는 게 가장 어렵다.
“이런 거 뭐하러 사왔냐” 하실 게 뻔하지만, 그래도 일본 녹차라면 괜찮겠지 싶었다. 숙소에서 마셨던 오이오 티백조차도 맛있었으니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고르게 된다.
결혼 후에는 특히 부모님께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미안함이 크다. 그래서인지 공항에서 그들의 선물을 고르며, “이걸 받으면 좋아하시겠지” 하는 상상을 하는 순간이 늘 따뜻하다.
그렇게 두어 시간 후, 나는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아쉽게도 10박 11일의 교토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 여행이 끝난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잠시 도쿄로 이동해 또 다른 여정을 이어갈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회사 일,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 그리고 이 여행을 허락해준 소중한 와이프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집안일. 내가 다시 살아가야 할 ‘일상’의 자리들이다.
이번 여행에서 남긴 글과 사진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천천히 정리해 볼 생각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 기억이 조금은 바래더라도
그 온도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終わりは、静かに訪れるもの。"끝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