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을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사실 나는 잠이 예민하다. 그래서 와이프와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각방을 쓴 지 꽤 됐다.
얌전히 11자로 누워 자는 게 아니라, 大자로 눕고 몸의 한 부분을 비틀어야만 잠이 오는 편이다. 낯선 곳에서는 더 그렇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밤새 뒤척이다가, 다음날 곤혹을 치를 때가 많다. 어제 숙소를 옮긴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벽까지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선잠 비슷하게 3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아침 7시가 밝았다. 씻고 나가기엔 하루가 너무 길 것 같고, 다시 잠들기엔 방이 이미 훤했다. 게다가 세 번째 숙소엔 커튼도 없다. 일본식 벽종이와 나무문이 그나마 직사광선을 완만하게 막아줄 뿐, 날이 밝으면 답이 없다. 그렇게 누워 인스타그램을 켜보니, 와이프에게 DM이 와 있었다.
“여보, 여행은 잘하고 있어? 가기 전에 말했던 버킷리스트 잘하고 있지?
그중에서도 여보가 교토에서 달리기 해보겠다고 한 게 난 제일 좋았어.
남은 여정 동안 꼭 해보면 좋겠네, 그러면 오늘두 즐거운 하루 보내구!”
순간, 다다미 이불 위에서 망설여졌다. 어제 잠을 못 잤고, 숙소도 강에서 멀어졌고… 안 하려면 안 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할 수 있다면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캐리어에서 런닝화와 조깅복을 꺼내 입었다.
귀찮았지만, 일단 나왔다. 숙소에서 카모강까지는 약 600미터 남짓. 막상 뛰어보니 생각보다 가깝고, 그동안 내가 ‘멀다’고 단정 지었던 게 다 착각이었다.
카모강변에 닿자 신이 났다. 이른 아침, 이미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산책하는 현지인, 조깅하는 여행자, 출근길의 회사원들까지. 나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나도 다시 서울의 지하철에 섞여 비슷한 표정으로 출근하겠지. 그 생각이 스치다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교토의 아침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무릎 인대 때문에 오래 뛰진 못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달랐다. 그래서 였을까? 계획보다 2km나 더 달렸다. 그 덕에 하루 종일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통증이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두고, 4K보다 선명한 눈으로, 교토의 아침을 온몸으로 담을 수 있었으니까.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천했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공용 식탁에 앉았다.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 덕분인지 이제 제법 능숙하다.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오늘의 일정을 고민했다. 구글맵을 켜보니, 거의 모든 목적지를 다녀온 상태였다. 그래서 아직 가지 못한 북쪽의 ‘오하라’를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향한 오하라. 그곳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구글맵의 착오로 종점 두 정거장 전에 내려버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작은 시골길을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길가에 붙은 “식물을 훔치지 마십시오”라는 한글 안내문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뜻이겠지.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시골길을 지나, 오하라의 산젠인과 호젠인에 도착하여 차례로 둘러보게 되었다. 입장료는 꽤나 비쌌다. 각각 700엔, 900엔. 교토의 사찰들은 하나같이 입장료를 받지만, 그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기는 하니깐 말이야. 산젠인의 넓은 경내에 빛과 건물의 조합도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호젠인은 단정한 정원과 고요한 공기가 인상적이었다. 붉은 카펫 위로 햇살이 기울고, 바람이 향냄새를 흩날릴 때, 그 순간이 왜 돈을 내고라도 경험할 가치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입장시 받은 호젠인의 팜플렛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쁜 순간을 잊고, 천천히 기분이 온화하게 침착해지는 느낌이 됩니다.”
정확했다. 그곳의 공기는 확실히 사람을 느리게 만들었다.
평소 카메라를 취미로 하는 나로선, 이런 공간에 오면 언제나 화각을 먼저 고민한다. 35mm로 담을까, 50mm로 담을까. 하지만 이번 여행에선 단 하나의 표준 줌렌즈만 들고 왔다. 한때는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욕심을 부렸지만, 이젠 ‘놓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안다. 광각이면 좋았을 장면, 망원이었으면 더 드라마틱했을 장면. 그런 아쉬움은 늘 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화각 안에서만 나의 여행이 완성된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을 모두 담을 수 없듯, 인생도 그렇다. 보여지는 만큼,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충분하다.
오하라를 모두 둘러본 뒤,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카메라 속 결과물을 훑었다.
화각에 대한 아쉬움이 잠깐 스쳤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담을 수 있는 최선을 다했구나.’
오하라에서 돌아오는 길,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렸다. 저녁엔 니넨자카의 야경을 찍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몸이 먼저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늘 그랬듯 언제나 예뻤다. 빛은 따사롭지만 상냥했고, 그교토 골목 특유의 낭만이 묻어나오는 어여쁜 피사체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8일간의 익숙함 때문일까.
나는 카메라를 목에만 건 채, 구글맵의 목소리를 따라 그저 걸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스스로에게 말했다.
“빛담아, 지금 교토에서 있는 이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너는 이곳에 다시 오려면 꽤나 많은 부채를 지고 와야만 하는 곳이야.
그러니, 이곳에 있을 때 교토에게 최선을 다해. 돌아가서 그리워하지 않게.”
그 순간, 숙소로 돌아가면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예쁜 빛이 눈에 들어왔고, 골목 어귀의 그림자들이 제각기 제 화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리한것은 아니다. 내가 가는 숙소까지 스며든 예쁜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안의 피사체만을 담아낸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시절인연이다.
지금의 교토는, 언젠가 다시 오게 될 교토와 분명 다를 것이다.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 세상일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내가 담을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교토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今日という日を、丁寧に生きる。"오늘이라는 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