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시대
필자도 평소 SNS를 자주 하는 편이다.
사진을 찍고, 거기에 맞는 짧은 글을 덧붙여 가상공간에 올린다. 그곳은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기 만족을 확인하는 공간에 가깝다.
처음에는 그곳에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조용히 투고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게 묻게 된다.
나에게 친구란 무엇일까. 내 생각에 친구란, 그 사람의 소식이 궁금한 사람이다.
‘친구들’이라 불리는 집단 안에서도 친밀도의 순서는 늘 바뀌어 왔다. 몇 년을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사람이라도 지금 연락이 닿지 않으면 조금 멀게 느껴진다. 반대로 한 번도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않았어도, 지금 꾸준히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이라면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나는 그 순서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상공간에서 연결된 이들이, 현실의 지인들보다 더 앞자리에 놓이는 순간이 생긴다.
게시글을 올리면 늘 묵묵히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댓글로 말을 건다. 각자 바쁜 일상을 사는 현실 친구들보다, 오히려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더 자주 나를 마주한다.
처음 SNS를 다시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정제된 사진만 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보는 이를 의식하게 되었다. 콘텐츠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고, 문장을 고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공간의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심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낮춰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존감이 조금씩 올라갔다. 활발히, 혹은 묵묵히 나를 챙겨주던 이들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어느 날, 추천 게시글을 넘기다 한 콘텐츠에 시선이 멈췄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SNS 숏폼을 ‘2일’이나 공유하지 않아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야기였다.
황당하게 들렸지만, 나는 쉽게 화면을 넘기지 못했다. 어딘가 모르게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좋아요’를 받기 위해 게시글을 올리는 시대를 넘어, 누군가에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콘텐츠를 투고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처럼, 감시받는 사회라기보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구조. 보이지 않으면 존재가 흐릿해지는 사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 구조 안에 있다.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진과 타인의 콘텐츠를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올린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가벼운 조각들이다. 조금 더 친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가 흥미로워할 만한 숏폼을 공유하며 안부를 대신하기도 한다.
반대로, 늘 활발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질 때면 괜히 마음이 쓰인다.
평소 올리던 주기의 게시물이 멈추면, 그 사람의 건강이나 마음 상태를 잠시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의 업로드 빈도와 메시지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평균’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평균을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을 꽤 아끼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10년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지 않았다. 그때의 SNS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는 창에 가까웠다. 관계를 확장하기보다는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관계는 무한히 확장되고, 우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도 일상을 나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보다, 서로의 패턴을 더 잘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의 침묵을 눈치채고, 그의 평균을 계산하고, 그의 일상에 반응하는 일은 단순한 과잉 연결의 부산물일까?
어쩌면 이것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애정 표현일지도 모른다.
비록 함께 커피를 마실 수는 없지만, 그가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 ‘함께’ 공감했다는 표시를 남기는 것. 그의 리듬을 기억하고, 그의 부재를 알아채는 것.
차가운 계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관심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과는 조금 방식을 차용하여 서로를 아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