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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JIN Mar 03. 2022

스타트업에서 말하는 일의 경계

내가 선을 그으면 그게 바로 경계야

 규모가 작은 회사에서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일의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는 것을. 그리고 한 사람의 업무 범위가 넓다는 것을. 마치 이일도 저 일도 다 내가 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게 느낌이 아닌 현실일지도.


 물론 처음 입사할 때 각자 정해진 포지션은 있다. 나는 SNS를 관리하고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등 마케터 포지션으로 입사했다. 이름은 '콘텐츠 매니저'. 하지만 콘텐츠 매니저라는 사람이 하는 일만 하지 않는다. 즉, 콘텐츠만 매니징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투어를 하며 투어가이드가 되고, 또 어느 날은 축제를 기획하는 축제기획자가 있다. 이렇듯 스타트업에서는 한 사람이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걸 내가 왜 해?'라며 업무 경계의 애매함과 범위가 넓은 것이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슈퍼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은 나 같은 사람에겐 오히려 좋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쏙쏙 골라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이것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몇 번의 역경을 극복한 후 비로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스타트업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때, 각자 업무의 경계가 모호하여 회사에서 첫 눈물을 훔쳤던 날이 있다.

 우리 팀은 첫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하기 위한 홍보물을 만들어야 했다. 메인 포스터를 제작해야 하는데 회사와 함께 진행하던 프리랜서 디자이너님께서 시간이 되지 않아 이번에는 함께 일을 못하겠다 하셨다. 나는 다른 디자이너를 찾던 도중 옆 동료가 자기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가 있다며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들었고, 하루라도 빨리 메인 포스터가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옆 동료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회계담당으로 입사하게 됐다. 회계를 할 줄 알아서 들어온 게 아니라 회사 사람들과 원래 알고 있는 마을 주민분이었으며, 교육, 영업, 마케팅 등으로 다양한 경험이 많으신 분이었다. 관심사가 다양한 분이셨고, 그때 당시 콘텐츠를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이 하고 싶으셨던 거 같다. 그래서 매번 나의 일에 관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본인이 하고 싶으면 밀고 나가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옆 동료가 자신의 지인인 디자이너에게 연락을 했고, 디자이너님은 현재 일이 바빠 못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설득했는진 모르겠지만 결국 해주기로 된 것이다. 그때부터 불안했다. 우리는 빨리 홍보 포스터가 나와야 하는데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을 진행하기로 했고, 디자이너님을 나에게 소개해줬다. 그러면서 3명(디자이너, 나, 옆 동료)의 단톡이 파졌다. 여기서 또 나는 의문을 가졌다.


'왜지...?'

'콘텐츠 담당자는 나고, 그럼 디자이너님과 둘이서 이야기하면 되는 건데, 왜 셋이서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와 디자이너 둘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옆 동료가 끼어있는 상황에서 일이 진행되었다.


일단 일은 진행해야 하니 단톡에서 이야기하게 되었고 메인 포스터에 대한 기획을 알려드렸고 디자이너님께서 알겠다 하셨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서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옆 동료가 나에게 하는 말

"디자이너님이 너무 바쁘셔서 못하시겠대요"

"네...?"


이건 뭔 개똥 같은 소리인가...? 그때부터는 화가 났다. 내가 화난 이유는

첫 번째, 바쁜 디자이너님에게 이 일이 무리한 걸 알면서도 옆 동료가 일을 강행한 점.

두 번째, 담당자인 나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둘이서 따로 이야기할 거면 단톡방은 또 왜 팠으며.

세 번째, 이제 와서 못하겠다 말한 디자이너님...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에는 내가 나의 업무를 확실히 주도하지 못한 탓도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다른 디자이너를 찾거나 급한 대로 내가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나는 디자인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블로그 운영의 경험으로 썸네일 정도는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창작이란 쉽지 않았다. 포스터를 만들다 이런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차마 회사 내에서 울긴 싫었고, 더 이상 못 참을 거 같아 회사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러고 엉엉 울며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한테 울며불며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고 언니가 다독여줬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업무를 잘 진행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물론 내가 더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의 업무의 경계를 뚜렷하게 잡지 못한 나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기도 했다. 모든 일에는 한쪽의 잘못은 없는 법이니까.  


 그러던 다음날 갑자기 옆 동료가 나에게 디자이너님이 포스터를 만들어주셨다 하며 이미지 파일을 전달해줬다.

"녜...?"


하... 바쁜 와중에서 만들어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일을 이렇게 진행하는 건 아니지, 이 또한 단톡은 조용했고 옆 동료를 통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나는 '뭐 하자는 거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 그래... 그래도 디자인물을 받은 게 어디야 하며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디자인물은 내가 생각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수정 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기에 추가적으로 넣을 정보들은 내가 직접 편집해서 넣고 그 디자인을 사용했다. 그렇게 포스팅을 완료했다.




사실 이 사건 이후에도 그녀가 나의 업무 범위 안으로 넘나드는 일이 많았지만 여러 번 겪으면서 배웠다. 내 업무의 경계는 내가 만들어야 함을 깨달았다. 어떤 새로운 일이 나타났을 때 그 업무가 나의 것이라 판단되면 내가 하고, 내 업무가 아니지만 그 일이 하고 싶을 때는 그 업무의 본 담당자와 이야기하여 타협점을 찾고 새로운 경계를 만든다든지. 또한 누군가가 나의 업무를 하고 싶어 할 때 딱 잘라 확실히 이야기하고, 혹시 나의 업무 과다로 진행할 수 없다 싶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넘기는 식으로 진행했다.


3년도 안된 스타트업이었고, 이렇게 큰 프로젝트는 처음 진행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업무와 관련된 기준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일을 진행하는 부분이 있었고,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움직인다기보다 서로 소통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방식으로 일을 했다. 규모가 작은 회사에 다니시는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 애매하고 넓은 경계를. 이 상황을 불평불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애매함을 명확하게 만들면 된다.


내가 로컬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겪은 바에 의하면

스타트업에서 말하는 일의 경계는 내가 직접 선을 그으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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