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섬 앞바다에 가다
아내가 변했다.
밖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집에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정적인 아내가 요즘은
"이번 주말은 어디 갈까? 차박 갈까?"
라고 먼저 묻는다. 아내의 변화가 놀랍고 반갑지만, 부담이 되기도 한다. 아내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2주 주말 동안 나는 집에서 자지 못했다. 차박을 가자는 아내 때문에 2주 주말 내내 차에서 잤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제주도의 황금기는 뭐니뭐니해도 가을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하늘은 맑고, 길에는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는 가을! 아내가 이토록 설레여 하는 것을 보면 완연한 가을인가 보다.
오늘 범섬 바다에 왔다. 범섬은 서귀포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우리 가족이 제주도에 정착한 첫해 여름, 우연히 범섬 앞 호텔을 예약하고 놀러왔다가 그 압도적인 풍경에 충격을 받았다. 제주도 바다가 멋지지 않은 곳이 없지만, 범섬이 있는 바다의 풍경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제주 정착 첫해, 범섬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 우리 가족은 매년 여름마다 의식처럼 같은 곳으로 휴가를 갔다. 범섬 바다에 오면 커다란 카메라를 둘러멘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범섬 바다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가을 억새까지 핀 범섬 바다는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메고 온 무거운 dslr 카메라로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 저기 갈래?"
아내의 손끝을 따라가니 수제맥주를 파는 펍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카페에서 보는 범섬의 풍경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내는 풍경이 좋은 카페에 가면 항상 맥주를 시킨다. 멋진 풍경을 보며 맥주 한잔을 할 때마다
"너무 좋아. 이런 게 힐링이지. 이러려고 제주도 사는 것 아냐?"
라는 말을 한다. 오늘 마신 맥주 역시 기가 막혔다. 아이들이 시킨 음료도, 디저트 음식도 모두 고급졌다. 하지만 이런 곳에 오면 주의할 것이 있다. 바로 가격이다. 가성비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음료 몇 잔에, 디저트 몇 개 시켰을 뿐인데 영수증에 찍힌 가격을 보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해빙(Having)하자! 누려야지.'
'더 해빙'의 이서윤 작가 글을 떠올리며 만족감을 느끼려 했다.
"제주도에 사니까 주말 퀄리티가 너무 다르지 않아? 서울에서도 맛있는 수제 맥주는 먹을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런 뷰는 해결이 안 되잖아. 여기 아니면 절대 누릴 수가 없잖아."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에 살면 주말이 달라진다.
어디를 갈 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디를 가도 이 곳은 제주도다.
꽉 막힌 길 위의 차안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쭉 뻗은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달리며 제주의 바람을 느끼면 된다.
사진 스팟을 찾아 차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어디든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면 그곳이 최고의 스팟이 된다.
급할 것이 없다.
그냥 누리면 된다.
범섬 바다를 바라본다.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