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동화 ‘오즈의 마법사’. 캔자스라는 시골마을에 살던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을 떠나게 되고, 시리즈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험 도중 오즈를 만나 소원을 말하고 싶은 갖가지 친구들을 만나 함께 오즈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 안에서는 심장(마음)을 갖고 싶던 양철 나무꾼, 두뇌(지혜)를 갖고 싶던 허수아비, 용기를 갖고 싶던 사자가 친구들로써 등장한다. 나의 경우엔 마음을 반쯤 잘라내고 두뇌는 반쯤 더 붙이고 마음에서 두뇌로 가는 길은 막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아마도 최고 까탈스러운 요구를 가진 고객이 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지나가는 할머니들을 못 지나치는 아버지, 지나가다 누가 길을 물어보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곳까지 같이 동행해주는 엄마. 오지랖 쟁이들이라고 장난스레 말하기도 하고 적당히 하라고 화를 내며 말리기도 하는,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는 남들이 ’ 예쁜 마음‘이라고 칭하는 그 마음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렇다고 마냥 사람 좋은, 착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무섭게 칼바람이 부는 질풍노도의 시기도 겪어보았고, 청소년 시절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를 주어 끝내 용서받지 못한 잘못도 해보았다. ‘00시’라고 붙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러므로 시골이 아니라고 우겨대면서 지도 밑자락 쪽에서 약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고2 때, 친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쯤은 별거 아니라고 여기는 친구들이 가득한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행히도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 가운데에는 행동도 판단도 미숙하여 때때로 공격적으로 보일지언정 그 와중에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걱정하였고, ‘내 인생 그까짓 거 이번 회차에는 버려야지’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하나 없었다. 마음만은 순수했던 친구들이었기에 망정이지 주변의 영향을 잘 받는 내가 큰 도시에서 내일의 무서움이란 없는 친구들과 일찍부터 함께 지냈다면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날 매주 억지로 끌고 가던 친구와 매주 주보를 제출해야 했던 학교 덕에 (지금의 나는 그것을 주님의 보호하심이었다 생각한다.) 종교인이 된 지금의 나는 종종 내가 상처 주었던 그 친구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더 이상 상처 주지 않고 싶어져 조심하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신 덕분에 현재에도 감사함 가운데 꼭 누군가는 해야 할 귀한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귀에 피가 나도록 ‘누굴 만나든, 심지어 천하의 나쁜 놈을 만나 막장드라마 같은 끝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잘 마무리 짓는 게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하는, 참 마음이 예쁜 소녀 같은 우리 엄마 덕분에 상대의 마음을 생각하거나 공감하는 마음이 비대하게 큰 어른으로, 계절마다 바람과 공기의 향기를 구별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지금보다 젊은 날의 갖가지의 이벤트가 키워낸 그 비대한 마음이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극과 극을 달리게 하는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장점은,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나만 즐거운 직업 같으니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곁에서 그들의 남은 인생이 좀 더 편하기를 바란다 ‘를 이유로 내려놓게 하였다. 또한 작고 예쁜 풀꽃만 보아도 상대방의 작은 배려에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소확행 충만한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건 존중받아 마땅한 귀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하여 현란하고 유혹이 많은 세상 가운데에서도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변별하게 하였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입장에서 타인의 수고와 배려를 감사할 줄 아는 건강한 가치관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장점만큼이나 때때로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단점들도 꽤 많다. 내가 도로시에게 까탈스러운 손님처럼(Demand custumer)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말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크게 불편한 순간은 다음의 두 가지 상황들. 첫째, 내 마음은 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덕분에 내가 인식하지 못하므로 내 몸은 종종 나에게 스트레스 지수나 마음의 과부하 경고를 몸살이나 열감기 같은 잔병치레를 통해 신호를 주어 날 반강제적으로 쉬어가게 한다. 하지만 또 반대로 맘이 불편할 때면 무슨 산송장처럼 잠이 오지도 먹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마음이 갑의 역할을 하는 게 분명 해지는 시점이다. 둘째, 무슨 일이 닥쳤을 때 특히 그 상황이 내 감정 혹은 인간관계와 깊게 연관된 경우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날뛰며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의 바쁜 움직임 덕에 내 머리는 하얗게 멈춘다. 덕분에 대부분의 결정은 결국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유치원을 그만두고 이력서를 가지고 유럽으로 떠났을 때에도, 승무원 대신 인지치료사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배후에도 ‘비대한 마음’의 역할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어떤 이는 무모함, 멋짐, 용기, 철없음, 대단함 등의 다양한 어휘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어찌 늘 좋은 것만 있겠냐만은..
당장이라도 내던지겠다 마음먹은, 장단점이 극명한 ‘비대한 마음’은 … 사실 훗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은 내 유산이며, 나 자체이다.
이렇게 한 순간조차도 참지 못할 만큼 버거울 때가 간혹 있지만 나는 대부분의 삶 속에서 조금은 균형이 맞지 않는 내 비대한, 따뜻한 마음을 좋아한다.
그렇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순간에 머무는 나는 그저 이 순간이 버거웠던 것이었다. 도로시를 따라가서라도 이 버거움을, 나 다움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싶었나 보다. 지극히 나 다움을 잠시 벗어던지고 싶었구나. 끄적이고 끄적이다가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섬주섬 마음을 추슬러본다.
도로시... 먼저 떠나요. 조금만 더 버텨볼게요. 조금만 쉬어가면 괜찮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