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

아이들의 소란

by 이주나

"그러니까 선생님, 말하자면 봄바르디로가 먼저 폭격해 놓고 파타핌이 반격하니까 열받아서 더 세게 칠 거라고 하는 게 '적반하장'이라는 얘기죠?"

"무슨 소리야! 트랄레로 트랄랄라 무섭다고 민트한테 도와달라고 해놓고선 걔 물건까지 다 뺐어가는 게 '적반하장'이지! "

"야! 어제 니가 나한테 한 게 적반하장이다! 통통 사우루스 쓰고 돌려준다면서 안 주고 발레리나 카푸치나까지 가져갔잖아! "

" 아, 진짜.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으시겠냐? "


아이들은 '적반하장'이라는 사자성어 설명 하나로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고작 네 명뿐인 수업이었지만, 말이 많은 남자아이들이었기 때문인지 교실을 꽉 채운 듯 왁자지껄했다. 선생인 내가 한마디를 하면 두세 마디는 더 붙이고 거기에 나아가 다른 이야기들까지 서너 마디 더 끌어와서 수업 시간 내에 진도를 맞추기에 정신이 없다. 수업이 다 끝나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수업이 끝나길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한마디 했다.

"아이들이 저렇게 떠들면 조용히 시켜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시끄럽던데? 수업이 돼? "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종 수업이 지연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걸 잡아줘야 할 때도 있었으니까. 또 너무 시끄러운 건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소란 안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맛이 있다. 보통 윤후가 수업 중에 나온 이야기와 관련한, 그렇지만 조금 다른 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치며 동훈이나 서후가 나선다. 둘이서 말이 오가다가 우성이가 치고 들어온다. 그러다 다시 윤후나 동훈이가 다른 이야기를 하며 화제 몰이를 한다. 솔직히 나로서 이들의 대화 패턴을 지켜보고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즐거운 일이어서 사실 수업 진도가 아니었으면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돈을 받고 가르쳐 눈이 보이는 결과를 내야 하는 사교육 선생님이다. 그래서 그 소란스러움, 하는 이들도 재미있고 보는 이도 재미있는 그 소란을 잠재우고 다시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소란은 가까이서 귀 기울여 들으면 꽤 재미있는 것이어서 내 주변이 시끄러운지도 모른다. 빠른 이야기 흐름을 눈으로, 머리로 따라잡기 바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발짝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소란은 그저 웅성거림에 가까운 형태가 없는 소음이어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짜증 나게 시끄러운 소리의 울림일 수 있겠다.

비단 아이들의 소란만 그럴까? 가까이하는 이에게는 행복이어도 멀리 있는 이에게 불행인 것은 소란뿐만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 도로에서 크게 음악을 틀어놓는 소리, 운동회날 응원하는 목소리로 가득한 운동장, 공연장에서 스타를 보고 지르는 함성 등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소리는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소리가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이유는 결국 나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하지 않고, 거기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소리가 고통이 된다. 더욱 정확히는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거슬리는 소리가 된다. 상관하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내 아이라면? 아니면 내 아이의 친구라거나 조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아, 저 아이는 요즘 저런 데 관심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의 소리는 내가 자세히 내용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질문하거나 관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기에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은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내 주변으로 가까이 끌어당겨 생각해 보면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나와 무관해 보이는 주변의 것들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상상력이 있다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