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Jul 11. 2024

선생님, 저 마음에 안 들죠?

이 글을 쓰기 전 참 많이 고민했다.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참 교사가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내 주위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각급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고 아이들에게 좋은 것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기 위해 연구하시고 고민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기에. 지극히 개인의 넋두리임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대던 갓장이의 심정으로 하소연할 데 없어 마지막 보루로 선택한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협력강사 일을 한지 어느덧 2년 하고도 5개월이 다 되어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았고, 담임선생님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성장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기특했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비록 정교사는 아니지만, 교대가 아닌 사대를 나왔지만 한 아이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대했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 그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내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 교사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좋은 사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기에 매 순간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담임선생님이 무서워서 말 못 하는 이야기를 나에게는 편하게 하던 아이들, 학교에서 조금은 기댈 언덕이 필요했던 아이들에게 나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고 싶었다. 진심이 통한다는 말은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순수한 아이들에게 오히려 어울리는 말임을 깨달으며 시급이 적어도, 일부 선생님들의 무시를 받아도 어차피 내가 봐야 하는 대상은 아이들이고 담임선생님의 힘듦을 그냥 조금, 아주 조금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작년에 일했던 곳과 또 인연이 되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 만났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를 반겨주었고, 관심을 표현해 주었고 선생님들도 강사인 나를 존중해 주셨던 기억이 있는 따뜻하고 좋은 학교다. 그런 학교에서 일 년 더 일 할 수 있음이 참 감사했었는데.

올 해는 뭔가 다르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일 한지 두 달 정도 되었을까. 같이 일 하는 강사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선생님, 우리 이제 협의회실 사용 못 할 것 같아요.”  



작년에는 쉬는 시간이나 중간놀이 시간에 학년 협의회실을 사용했었는데 협력강사의 수업지원을 받지 않는 같은 학년 선생님께서 협의회실 사용을 금했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 본인들이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있으면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속상했지만 협의회실은 학년 교사들을 위한 공간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작년 선생님들의 배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한 명의 협력강사 선생님과 나는 갈 곳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며칠을 방황하던 중 우연히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아니 선생님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쉴 공간이 없으세요?”


초1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나까지 초1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법. 미주알고주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일러바치는 1학년 아이들이 부러운 순간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 그 모습을 1학년 부장님께서 보시고는 여교사 휴게실을 사용하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여교사 휴게실은 모든 여자선생님께서 쉬려고 오는 공간 아닌가. 쉬는 시간에 사용은 하고 있으나 마음이 불안 불안한 건 여전하다.

사실 협의회실 사용을 금했으면 좋겠다고 한 선생님은 협력강사의 수업지원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본인과 상관없는데 굳이 자신이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래, 얼마든지 이해한다. 그런데 힘이 쫙쫙 빠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내가 들어가는 반 담임선생님이다.     


출처: pixabay


한 학기 동안 나에게 가타부타 별말씀이 없으시다. 그래, 본인의 수업을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우시겠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를 맡아 줄 누군가가 없으면 수업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는 걸 담임선생님도 아시기에 불편함을 감수하시고 강사의 도움을 받으신다는 거, 너무도 잘 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조금은 마음을 내어줄 수는 없으신 걸까.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담임선생님의 동태를 살핀다. 언제 인사를 해야 하나, 나의 인사가 담임선생님의 업무 흐름을 끊으면 안 되니까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 때를 계속 기다린다. 그런데 눈을 안 마주치신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등교하면 담임선생님께 가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처럼 내가 매일매일 선생님 앞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도 애매하고. 내가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일을 마치고 나가는 순간에도 먼저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다. 뻘쭘하게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다 그냥 나오기를 반복하다 이제는 나도 수업이 끝나면 후다닥 가방을 챙겨 나오기 바쁘다. 교사와 강사의 위치지만 내가 늘 선생님 책상 앞까지 찾아가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드리는 건. 그래, 기분이 좋지는 않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도 조금 상한다. 4개월 넘는 시간이 지났으면 선생님께서 먼저 나에게 오늘도 고생하셨다 한 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금쪽이가 수업 시간에 뛰쳐나가거나 바닥에 드러누울 때마다 팔목이 시큰거림을 감수하고 아이를 진정시키는 나의 애씀을 단 한 번이라도 거론해 주실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으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나의 수고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지나가는 말 한마디라도, 빈 말이라도 한 번 해주시면 힘이 덜 빠질 텐데.      

드러나지 않게, 그림자처럼 있고 싶기는 하나 아이가 괜한 고집을 부리고 생떼를 쓸 때, 감정이 격해진 아이가 폭력을 쓸 때(한 번은 떼를 부리다 내 목을 쳐 숨이 턱 막인 적도 있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이를 데리고 나와 해결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달래면서도 나의 수고와 애씀이, 아이에 대한 애정이 마치 메마른 땅에 부어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허탈해질 때가 있다.

어린아이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함을 안다. 자폐아이지만 자신이 조금 더 고집을 부려도 될 것 같은 선생님이 누구인지, 조금은 짜증을 내도 될 것 같은 선생님이 누구인지  다 알고 행동을 한다. 가끔은 ‘얘가 날 너무 만만하게 보네’라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을 때가 있지만 어쩌면 그만큼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는 뜻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오늘도 서운함을 뒤로하고 아이의 짜증을 받아낸다.     


“선생님, 금쪽이가 제 손은 안 잡아 주는데 선생님 손은 잘 잡네요.”

 도움반 선생님이 금쪽이와 나의 모습을 보고 말씀해 주신다.

그래, 이것 만으로도 족하다. 수업시간마다 뛰쳐나가던 아이가 쉬는 시간에만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수업시간에 드러눕는 횟수가 점점 줄고 글씨 쓰기 연습할 때 내 손을 잡아당겨 같이 써 달라는 의사를 표현하고. 도움반 선생님 손이 아닌 내 손을 더 잡아주는 지금. 학교 생활에 이만큼 적응해 준 금쪽이 네가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나타내주는 것 아니겠니.

금쪽이 너에게 내가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너의 변화된 행동이 필요하구나. 어느덧 우린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네. 너 하나 보고 교실에 들어올 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금쪽아!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게 선생님이 떠났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