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 자퇴하고 인도 간다고?

내가 2년 반 만에 인도로 다시 돌아간 이유

by 쭌쓰
"그래서, 다시 가고 싶어?"

따져 묻는 엄마의 목소리 톤이 뇌리에 차갑게 박혔다.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잘게 진동하던 가슴이 탁, 막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놓여있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표를 내려다보았다. 담임 선생님께서 하셨던 전교 2등, 이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자퇴 이후에도 계속 생각해 봤지만, 회피나 입시 탈출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외 경험을 통해 성공해 보겠다는 포부가 명확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3가지의 욕망을 떨칠 수 없었던 탓에, 나는 다시금 9시간짜리 인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인도에서 보냈던 4년간의 초등학교 생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한국보다 훨씬 넓은 집에 대한 로망,

내가 스스로 판 생각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첫 번째 이유를 설명하자면, 우리 가족은 인도가 처음이 아니었다. 2012년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아빠는 4년간의 해외 주재원을 발령받아 인도의 마하라슈트라 주, 푸네라는 도시에 가게 되었고 나와 동생은 선택권이 없었다.


영어를 정말 한마디도 못했던 나와 알파벳도 몰랐던 동생은 4년 동안 영어를 빠르게 배웠다. 아빠는 해외에서의 회사 생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지만 돈을 열심히 모으셨고, 엄마는 영어를 배우시고 낯선 땅에서 살림을 하시고 학교 가기 싫어 매일같이 우는 동생을 달래셨다.


난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울진 않았다.


국제학교에서의 초등학교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재밌었기 때문이다. 나를 부담스럽게 하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사라졌으며 (아직 초등학교에 시험이 존재하던 때였다), 개개인의 재능과 창의성 위주의 수업에 나는 하염없이 매료되었다.


수영을 배우고, 방과 후에는 승마를 하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초록 눈을 가진 남자아이에게 내 생애 첫 러브레터를 받았다.


초등학교를 나름 수석(?)으로 졸업해 학년 대표로 졸업식날 연설을 했었다. 2016년 겨울,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그것은 내 마음 한편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어 박혔다.


두 번째. 동생과 집안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던 초등학교 아이에게 옥상을 갖춘 펜트하우스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이 인도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은 11,12층이 이어진 복층이었으며, 12층이 꼭대기였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옥상으로까지 우리의 놀이를 연장할 수 있었다.


앞집에 살았던 우리 또래의 여자아이와 우리는 서로의 높은 집을 오가며 연극놀이, 술래잡기, sleepover 등을 하기 바빴다. 1층의 침실은 부모님이, 2층의 작은 방들은 나와 동생이 썼었는데, 처음으로 가져본 내 방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내 방에서 혼자 잠에 들기 전, 창문을 쌀짝 젖히고 밤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아직 개발이 덜 되어 가로등이 많지 않았기에 총총 빛나는 별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물론 개 짖는 소리는 덤이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아직 개발이 덜 끝나 공사소음이 많았지만, 아직 토목 공사 시작 전의 넓은 공터는 한번 시골에 살아본 적 없는 나에게 들판에서 뛰노는 것 같은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한국에서의 좁은 복도식 아파트와는 달랐다.


마지막으로, 눈물 콧물 쏙 빼며 입시를 거쳐 들어간 외고를 때려치우게 만든 건, 동생의 한마디였다.

국제 학교에서는 창의력과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기를 수 있어. 유학을 갈 수도 있으니까 훨씬 가능성이 많아!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위와 같은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은 나보다 훨씬 용감했다. 아니,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양산을 가지고 놀다 우산 살 끄트머리에 눈이 찔려 피를 흘리며 안과로 가거나, 거실에서 뛰다 TV 책상 모서리에 귀가 찢어져 꿰매거나, 화내는 엄마에게 말대답을 하는 건 동생의 역할이었다. 어쩐지 겁이 많고 생각은 더 많은 나는 한 번도 동생을 말싸움에서 이겨 본 적이 없다.


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얘는 나보다 어리면서 어떻게 엄마 말이 떨어지자마자 간다고 할 수 있을까.


순간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해 펑펑 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부끄러웠다. 어릴 때의 나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었어도 점수 하나, 등수 하나에 집착하지는 않았는데...


나름 공부 열심히 한다는 지역에서 2년 반 가량을 지내며 어느 순간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성적으로만 결단 지었다. 부모님이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압박하지 않았음에도, 나 스스로 그랬다.

어느 순간 내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성적을 가지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동생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거실 바닥을 계속 응시하자, 엄마는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동생과 아빠만 가거나, 고등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나는 외고를 계속 다니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나 갈래.


안녕. 고마웠어.

외고에서의 마지막 날, 1학기 기말고사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나는 짧지만 강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슬펐을까. 아마도 이번에 한국을 떠나면 다시는 또래 한국 아이들 사이에서 느꼈던 끈끈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갖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싶다. 해외에서의 삶을 택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2019년 7월 중순, 나는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퇴를 해봤다.

(사진: 한국 집의 안방. 피아노 옆의 가구와 액자, 드림캐쳐는 인도에서 사 온 것들이다. 통 나무로 만들어진 인도의 가구들은 참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