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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원 Jan 07. 2017

위대한 리더, 빌 러셀

One for All. 팀을 위해 헌신한 최고의 리더

17년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다른 해와 달리 마냥 기쁘게 새해를 시작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한 살 더 먹었다는 서글픔 말고도 국가의 리더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 진행형 사태를 보며 나는 리더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리더가 진정으로 훌륭한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


난 NBA 역사에서 우리의 리더가 본받을 만한 리더를 찾고 싶었다. NBA의 역사를 둘러보면 수많은 리더들 가운데 뛰어난 리더는 많았다. 그중에 내가 찾는 리더가 있을까?


선수 중에는 일단 조던, 던컨, 르브론 등이 바로 떠오르고 감독 중에는 필 잭슨이나 제리 슬로언, 레드 아워백 등 역사 속 명장도 있고 현역 감독으로는 스퍼스의 포포비치 감독이나 골스의 스티브 커 감독 역시 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내가 찾은 리더는 아쉽게도 이들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마이클 조던이 뛰던 시대를 지나 50-60년대에 뛰었던 전설적인 센터, 빌 러셀의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이다.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 : 11번의 우승


비단 스포츠 팀의 리더 최우선적으로 평가받는 항목이라면 역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빌 러셀은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이다.


흔히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14년의 커리어 기간 중 6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빌 러셀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우승 반지 갯수보다 손가락이 모자랄 때 꿀팀 알려준다.


빌 러셀은 보스턴 셀틱스에서 단 13 시즌만을 뛰면서 우승을 놓친 시즌이 2년 차 시즌과 11년 차 시즌 2 시즌에 불과하다. 즉 나머지 11 시즌을 모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얘기이다. 더 놀라운 것은 11번의 우승 중 8번을 연속으로 우승했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마지막 3 시즌은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자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면서 2 연속 우승이라는 업적 이뤄냈다. (감독 첫 시즌에는 9 연속 우승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 체력적 부담 등으로 우승을 윌트 체임벌린에게 빼앗긴다.)


선수겸 감독하면 슬램덩크의 이 캐릭터가 먼저 생각난다.


그렇다면 그가 뛰던 50-60년대에는 그를 막을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천만에.


오히려 그가 막기 힘든 괴물이 존재했다. 바로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전설의 3 센터라 불리는 '고대 괴수', '신화 속 거인' 쯤 여겨지는 인물인데 그의 개인 기록은 NBA 역사를 둘러봐도 다시는 안 나올 전설들이다.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 신화 속 거인들의 대결의 한 장면.


한 경기 최다 득점 1위, 100 득점.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55개. 한 시즌 평균 50 득점 이상. 한 시즌 평균 출장시간 48.5분. (한 경기 시간은 48분이다. 즉, 연장전까지 전 경기를 풀-타임 출전한 것인데 아무리 비중이 높은 슈퍼스타라도 평균 출장 시간이 38분 정도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괴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빌 러셀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수비형 센터


농구에서 센터에게 '20-10을 해준다.'는 표현은 보통 평균적으로 한 시합당 20 득점에 10 리바운드 이상 정도는 할 능력이 있는 좋은 센터에게 해주는 말이다.


빌 러셀 역시 20-10을 해주는 좋은 센터였는데 기존의 통념과는 조금 달랐다. 뭐가 달랐냐면 그에게 20-10은 20 리바운드 10 득점을 의미했다. 그만큼 득점보다 득점 외적인 일에 치중했다는 의미.


빌 러셀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수비형' 센터다.


당시는 블락이 집계되기 이전이지만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최저로 수치를 추산했을 때 그는 한 시합당 평균적으로 7-8개 정도의 블락샷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서 한 시합당 2개 정도의 블락을 해도 아마 블락 랭킹에서 최상위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낮게 잡아도 7-8개라니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저녁은 불낙!!


물론 그 당시에는 빌 러셀이 '블락'이라는 개념을 거의 처음 만들어낸 시기이기도 했고 3점 슛조차 없던 시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수치인 건 변함이 없다.


물론 윌트 역시 어마어마한 블락커였지만 러셀의 블락과는 그 태생이 다르다.


“나는 시합에 임하면서 상대 선수의 모든 슛을 블로킹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요점은 모든 슛을 블로킹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모든 슛을 블로킹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빌 러셀


또 한 가지 윌트의 블락과 달랐던 점은 그가 블락한 공은 대부분 높은 확률로 같은 편에게 간다는 점이다.

덩크만큼 호괘한 파리채 블락은 환호를 자아낸다

파리채 블로킹이 멋져 보일 수 있지만 그는 멋 따위를 생각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멋없게 툭 쳐내는 블락은 여지없이 팀원의 손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이것 역시 공을 아웃시켜 공격권을 내주지 않고 오히려 공격권을 가져오기 위한, 팀을 먼저 생각한 블락이었다.



선수 빌 러셀의 이면


그럼 그가 공격력이 없는, 처음부터 수비적인 센터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수비형 센터라는 별명은 빌 러셀의 팀을 위한 철저한 자기희생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의 공식적인 키는 206cm지만 농구화까지 포함하는 현대의 농구선수들의 키를 재는 방식과는 달리 당시에는 맨발로 키를 쟀던 것을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 그의 키는 211의 드와이트 하워드와 엇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 키에 운동능력은 르브론급 이상이었다. 러셀은 중고교, 대학시절에 단거리 달리기, 높이뛰기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400 미터 기록이 49.6초였고, 높이뛰기 기록이 2미터 6센티였다.


몸을 풀 때 러닝 점프로 백보드 상단을 터치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이런 운동능력에다가 BQ(IQ의 농구 버전. 농구에 대한 이해도) 역시 뛰어났고 '센터 치고'가 아니라 가드만큼이나 볼 핸들링과 드리블이 좋았다.


50년대 센터의 흔한 드리블.gif
50년대 센터의 흔한 드리블(2).gif

센터의 드리블이나 역할이 극히 제한되었던 50년대에도 그는 위와 같은 본인이 직접 드리블해서 마무리하는 플레이들을 커리어 초창기에 즐겨했다.



One for All. 팀을 위한 거인의 희생


이렇게 농구를 잘하는 러셀은 어느 순간부터 플레이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드리블을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수비와 리바운드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의 최우선 순위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플레이의 모든 것은 오로지 팀을 위한 플레이가 되어갔다. 팀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는 사람에게 팀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팀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 팀에게 맞추기 시작했다.


러셀의 말에 의하면, 한 번은 자신이 리바운드 잡고 드리블까지 치고 나와서 속공을 성공시켰는데, 포인트 가드, 밥 쿠지가 팔짱 끼고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설치는 게 팀 케미스트리에 안 좋겠구나' 생각했답니다.     출처 : 다음 카페 I Love NBA. Doctor J 님의 글 '5-툴 센터'


팀의 에이스가 기둥이 되어줄 때 팀원들의 신뢰는 단단해진다.


러셀은 충분히 팀의 에이스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에이스였다. 하지만 본인은 화려한 역할보다 리바운드와 수비 같은 궂은일에 집중하고 공격에서는 팀원들을 믿었다. 그가 팀원들을 믿자 팀원들은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팀원들 역시 그를 믿었다.



러셀 개인은 윌트에게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윌트가 리바운드를 55개를 잡으며 기록을 세울 때 상대는 러셀이었다. 10cm나 차이나는 윌트를 아무리 러셀이라도 쉽게 막진 못했다. 오히려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였다. 거인의 희생에 대한 보상은 NBA 역사상 전무후무한 총 11번의 우승이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 : 경기장 밖에서의 흑인 빌 러셀


실력뿐만 아니라 경기장 바깥에서도 빌 러셀은 '인간, 빌 러셀'로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그의 실력과 인성에 대한 팀원들의 믿음은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던 사회 분위기마저 초월했다. 66-67 시즌 그의 감독 부임 첫 해 동부 파이널에서 윌트의 필라델피아에 1승 4패로 패배했는데 그 후 라커룸의 일화를 소개한다.


시합 후, 보스턴 라커룸에서는 백인 선수였던 존 하블리첵이 흑인 선수인 샘 존스에게 먼저 샤워를 하도록 양보한 뒤, 샘 존스가 샤워하기를 기다린 후 자신도 샤워를 마친 것은 물론, 샤워 후 두 선수가 나란히 앉아서 시합의 문제점에 대해서 토론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아직, 흑인 선수들이 원정길에 호텔이나 식당에서 쫓겨나는 일이 많았던 시절에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빌 러셀 하의 셀틱스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S-Kid] NBA 열전-4.NBA의 전설 빌 러셀


빌 러셀, 무하마드 알리, 짐 브라운, 카림 압둘-자바


이외에도 그는 흑인의 인권 향상을 위해서도 힘을 썼는데, 흑인 선수가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자 그 도시에서 시합을 출전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마틴 루터 킹과도 친분이 있었고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미국의 베트남전 파병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렇게 빌 러셀은 경기장 밖에서는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경기장 안에서는 오로지 팀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 줄 아는 진정한 리더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All for One.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본인만 생각하는 리더가 아니라

빌 러셀 같은 One for All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리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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