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금수저와 흙수저의 경계가 정확히 어느 선인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나는 금수저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걸 단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넘어지고 울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서 내 인생을 개척해가는 자신이 기특하다 못해 자랑스럽고 어찌 보면 재미도 있다. 숟가락 얘기는 비단 부모의 경제력만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정서적으로도 금수저, 흙수저가 있다. 그건 별개의 수저다.
나는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에 커피숍 알바를 시작했다. IMF 직격탄을 맞았던 아버지 사업 때문에 알바를 해서 학교 갈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등록금은 언니가 대출을 받아주었다. 나는 알바가 재밌었다. 돈도 빽도 없는 인생인 건 진즉에 알았고,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고, 아무렇지 않은 내가 멋있었다. 내 힘으로 살면 되지. 공장, 커피숍, 수영장, 나레이터, 재즈바, 과외, 강사, 그렇게 여러 종류의 일을 맛보며 학교에 다녔다. 야구장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 도우미도 했다. 일당이 제일 셌다. 그때의 사회 경험들은 지금 내 직업에 재산이 되었다.
물론 고생 안 하면 좋겠지만, 나는 경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생도 해봐야 그게 고생인 줄 안다. 특히 빽 있는 청춘들은 더욱. 예술하는 청춘들은 더욱. 아무런 혼란도 방황도 고생도 없이 어린 나이에 부모 찬스로 어떤 부류에 낀 인간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찬스를 계급이라 여기는 인간들을 나는 혐오한다. 그들의 예술 작품마저 혐오한다. 깊이나 고뇌가 전혀 보이지 않는 보여주기식. 인생도 예술도 억지로 보여주려고 하면 누가 보고 싶을까.
수천만 원을 제시하며 대필을 청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분야는 에세이. 주로 자서전이었다. 나는 가난한 작가니까 대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작품을 쓰는 게 물론 행복하지만, 대필이 도둑질해서 돈 버는 건 아니니까 자존심 운운하지는 않았다. 돈이 절박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가난해도 받지 않는 청탁이 있다. 같잖은 인생을 부풀려 써주기를 원할 때.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 책을 쓰려고 할 때. 눈앞에서 수천만 원이 사라져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절했던 작업들을 다 했더라면 지금 이 집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좀 멋진 사람이기를 바란다. 남들이 그렇게 봐 주길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멋진 사람이라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선택 앞에 놓였을 때,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질 줄 아는 사람. 돈은 없지만 돈에 양심을 팔지는 않는 사람. 여전히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여전히 열심히 쓰는 사람. 입에 발린 소리에 입바른 말로 보답하지 않는 사람. 젊은 날의 고생과 상처에 연민을 갖지 않는 사람. 재산 한 푼 없이 늙어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부자가 되기엔 글러 먹었을 것이다. 괜찮다. 그것마저 괜찮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람. 남들 평가 다 필요 없고 내가 날 멋지게 생각하는 사람.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성실했고 떳떳했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내가 악마가 아니라는 걸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글쓰기가 내 자존감을 높여주었다는 말이다. 유명과 무명은 상관없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어차피 모든 글에는 자신이 투영되어 있다. 내가 아무리 인물과 거리를 두려고 해도 어느 시절의 내가 몇 방울은 들어있다. 그걸 보면서 위로받았다. 내가 쓴 글에 내가 위로받다니.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글은 정말 그런 마법을 부린다. 써보면 안다. 그래서 한 번 써 본 사람들은 계속 쓴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대필을 맡기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가장 잘 쓸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신들린 듯 원고지 100장을 앉은 자리에서 쓸 때가 있다. 며칠 전에 그랬다. 앞쪽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손가락은 내용을 계속 이어서 쓰고 있다. 그때는 화장실도 가지 말아야 한다. 생애 몇 번 오지 않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속칭,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렇게 쓴 소설들은 다 쓰고 읽어보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내가 이런 문장을 썼다고? 작가들은 그분을 붙들기 위해 오줌보도 붙들고 배고픔도 잊는다. 그분과는 언제든지 연결되어도 환영이다. 아니, 제발 오시라. 영혼을 다해 붙잡을 테니.
그렇게 써야 글이다. 그렇게 쓰는 게 전부다. 그분이 오시면 미친 듯이 쓰고, 영영 올 기미가 없으면 느려도 내 힘으로 쓰는 방법 외엔 없다. 밥벌이를 못 해도 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글이 돈으로만 환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자존감을 지켜주기도 한다. 출간되어 물성이 되면, 마음의 재산이 된다. 내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쓰다듬으며, 내가 썼지만 내 이름이 없는 책을 위로한다. 내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주인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쓸 자신이 없다면 출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치인들, 기업인들, 연예인들. 기타 금수저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 글에 영혼을 넣는 것. 그건 스스로 써야 가능한 일이다. 돈 받고 대신 써주는 글에는 딱 받은 돈만큼의 필력만 존재한다. 당신의 인생을 내 인생처럼 생각하고 써주는 대필 작가는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왜 자꾸 책을 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예술에 비해 유난히 글은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금수저가 멋 부리기 가장 쉬운 예술 분야일까. 그걸 이용하는 출판 업계도 문제지. 다들 이것 하나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억지로 쓴 글은 티 난다는 걸. 아무리 포장해도 냄새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자기 인생을 스스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인생도 책도 이미 구리다. 금수저이면서 서민인 척, 소탈한 척 쓴 글은 읽고 싶지 않다. 제발 그런 책은 내 눈에 띄지 않기를.
가난한 작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은 양은 소반에 금수저 하나 들고 끼어들지 말아라. 보리밥을 쌀밥으로 바꿔줄 테니 유령 작가가 되라고 현혹하지 말아라. 누군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 자기 인생도 스스로 못 쓰는 주제에 책만 내면 멋진 줄 아는 걸까.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이상한 나라에서 무명한 작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금수저나 출판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그만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결론은 이거다. 글은 스스로 쓰자. 못 쓰겠으면 배우면 된다. 많이 읽고 자주 쓰는 게 배우는 거다. 지식보다 체득이 가장 중요한 게 글쓰기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기억이 온전하다면 에세이 정도는 무리없이 쓸 수 있다. 누군가의 밥벌이와 누군가의 꿈을 사지 않아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대필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필 청탁을 거절한 그날부터 조금 더 멋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무명하지만, 그와중에 남의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내가 겁나 멋지다. 최근에 그분이 오셨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