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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pr 11. 2020

비극할 필요 (조커)

영화 속 대사 돋보기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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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아서 플랙의 직업이 코미디언 지망생이란 걸 생각하면 찰리 채플린이 어떤 식으로든 오마주되는 것은 뻔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찰리채플린의 말을 가볍게 변주함으로써 영화 내용과 메시지를 관통하게 되면 클리셰와 다름없는 오마주에 머물지 않는다. 기존의 것과는 또 다른, 고유한 힘을 가진 대사 남는 것이다. 변주된 대사는 순간순간의 분위기와 흐름에 맞게 변하는 독창적인 재즈 선율처럼 경쾌하고 가볍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아서 플랙-


 이 대사를 하는 시점에 아서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억지로라도 가지고 있던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놓아 버린다. 찰리 채플린의 희, 비극 비유와 이 대사를 연결하면 가장 가까이 두고 보살펴야 할 자신의 삶을 가장 멀리 두고 방관하기로 한 게 된다.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고 되는대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냥 살래.’라는 말이다.


 아서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신, 풀리지 않는 일, 병든 어머니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알아줄 연인도, 친구도 없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의 상담사조차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아서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사람과 상황 모두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정부에서 지원되는 치료는 중단되고, 동료조차 자신을 모함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희롱하고 때린다. 그러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아서는 선천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또한 후천적으로 세상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온 인물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범한 우리들 중 한 사람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불행과 불운이 연이어 겹쳐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근데 그게 그렇게 특이한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픽션, 즉 허구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실제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한 몫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나 다큐멘터리보다는 편안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유쾌한 내용은 아니지만 영화 조커 역시 픽션은 픽션이라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영화 속에서 거리로 몰려나온 여러 명의 조커를 보자 '불편해졌다.' 현실을 보게 된 탓이었다.  

 

 잃은 게 없는 사람들의 삶은 곧 코미디가 된다. 슬퍼할 거리가 남아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을 불러 일으지만, 슬퍼할 게 없어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방관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흉기는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라 단순한 장난감이 된다. 죽음은 놀이가 된다. 삶과 죽음이 단지 게임 한판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저 장난감정도로 느껴지는 흉기가 쥐어진다면 어떨까. 


 많은 게임은 누군가를 해하는 것을 주요 소재로 한다. 유저들은 게임 속에서 각종 무기나 마법으로 서로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죽음의 순간에는 가벼운 탄식이 섞일 때도 있고, 어이없는 웃음이나, 가끔은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게임을 즐기는 수많은 유저들이 사이코패스라거나 사회 부적응자라서가 아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어차피 허구이고 저 멀리 있다. 멀리서 보게 될 때 ‘죽음’이라는 무게는 한없이 작아진다.


  아서 플랙은 선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도 나도 조커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와 방화, 약탈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며 세상을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놓는다. 잃을 것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영화는 아서 플랙 한 인물을 조명하고 따라가지만, 수많은 조커를 담는다. 오히려 아서 플랙이라는 한 인물의 조커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조커가면을 만들어 쓴 사람들보다 한발 늦었다. 이미 조커가 양산될 준비가 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조커가면을 쓰고 나온 사람들을 보며 섬뜩해진 이유다. 그들은 삶이 더 이상 비극이 아니게 된 사람들, 자신의 삶을 방관하며 그냥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자신의 삶을 코미디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고, 비극이어야 한다. 자기 연민, 남 탓, 사회, 운명에 대한 불만은 자신을 괴롭게 하고 삶을 피폐하게 한다. 물론 바람직한 삶의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 삶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살아보자. 묵묵히 살아가다보면 기회가 있겠지.’          


 삶이 게임과 다른 이유는 희망고문일지라도 어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비극인 삶에 애착을 가지고 살다보면, 애착에 대한 일말의 보상이라도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다. 그런 일말의 보상은커녕, 삶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순간, 얄궂게도 삶은 희극으로 변한다. 그렇게 너도나도 조커가 된다. 괴로워선지, 즐거워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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