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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pr 19. 2020

이야기라는 이야기 (결혼이야기)

영화 속 '제목' 돋보기 

 우리는 모두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특정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항상 끝이 있다. 한정된 페이지와 분량 속에서 각각의 ‘어떤’ 이야기들은 일단락이 난다. 아무리 사실적인 다큐멘터리도, 기록 영상도 끝이 있기에,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에 명백한 허구다. 실상 우리 모두가 가진 이야기는 뾰족한 이야기도 없고 일정한 끝도 없다. 삶 역시 그렇다. 삶이 끝난다 해도 기억이나 유산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다. 직접적인 흔적이 없더라도, 흔적의 흔적, 영향의 영향이라는 것은 남는다. 때문에 죽음 역시 삶의 끝이 아니다. 


 <결혼이야기>는 ‘결혼’이야기라기보다 결혼‘이야기’에 가깝다. 분명 영화는 ‘결혼’을 소재로, 특정한 형태로 이어지고 나아가는 인물과 상황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말한다. 영화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고, 신뢰가 무너지고 파경을 맞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양육권 분쟁을 하며 비방이 극도로 심해지다 남편은 아내에게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는 말까지 한다. 그런가하면 아내는 남편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머리를 잘라주며 보듬어 준다.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한 분쟁 중엔 아내가 남편 취향에 맞는 음식을 시켜주기도 한다. 찬란했던 사랑은 극도의 증오로 변하고, 다시 애증, 연민, 이해, 씁쓸함으로 나아간다. 언뜻 ‘다정’한 것처럼 볼 수 있지만, 그냥 ‘다정하다’고 하기엔 복잡 미묘하고 깊은 맛이 깔려있다. 씁쓸한 뒤에 따라오는 어렴풋한 단맛은 그저 달기만도, 그렇다고 쓰다고만 할 수도 없는 그런 맛인 것처럼. 

 

 끝이 이럴 줄 알았다면, 흘릴 눈물과, 슬픔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사랑을 할까. 그런다 한들 누구나 사랑을 할 것이다. 사실 어떤 일이나 사랑 관계 모두 숙명적으로 결국 끝이 올 것을 알고, 슬프고 아파할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그 모든 걸 감수하게 한다. 끝이 두려워서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그 끝은 비슷해보여도 큰 차이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없는 것은 같을지언정,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 관계에서 온 슬픔과 잉여물이 내 안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한 겹을 또 쓴 채로 더욱 성숙한 사랑, 혹은 더더욱 머저리 같은 사랑을 할 것이다. 또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눈물과 고통으로 겹겹이 얼룩진 내가 남을 뿐. 


 가능한 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려 했던 쇼펜하우어 그는 ‘삶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삶의 정수다. 만나고, 사로잡히고 손에 넣으려 애쓴다. ‘내 것’인가 싶다가도 결국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놓아주어야할 때가 온다. 그 간단한 과정을 깨닫기 위해 많은 만남, 그 전의 무수히 많은 감정을 오가고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만남과 사랑 헤어짐이라 단순히 요약된다. 삶의 과정과 비슷하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고, 얻는가 싶다가도 다시 잃어버린다. 어떤 성취를 했다가도, 얻는 순간 다른 성취로 눈이 돌아가기 때문에 성취의 순간은 지극히 짧다. 


 놓아주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깨달음이며,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있는 것을 온전히 누리는 단계다. 산다는 것이 그렇고, 삶 역시 비슷하다. 내 것이라 온전히 맘대로 하는가 싶다가도, 그렇지도 않다. 삶을 산다는 건 통제하려는 욕망과 그에 부딪혀 좌절하는 것의 반복이다. 그러면서 놓아주는 법을 알아간다. 성숙한 시계추가 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영겁회귀로 느껴질 때가 있다. 먹고 싸고 자고 하다보면 하루가 가고, 고민하고 해결하면 또 하루가 간다. 관계를 형성하고, 끊어지고, 또 만들고 하다가 몇 해가 훌쩍 가있다. 처음엔 그런 모든 게 새롭고 재밌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뭉뚱그려진다. 고민하고 해결하고, 또 그 모든 걸 고민하고. 결국 뜻대로 되지 않고. 그러다 구체성을 잃고 모든 것이 지루해진다. 분명 살아있는 데, 시간은 가는데, 새로운 것은 없고 끊임없는 노동을 하는 시지프스가 된 것만 같다. 마치 시간이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 


 <결혼이야기>를 보면서 씁쓸했던 건 쳇바퀴 같은 삶의 모습, 그로부터 오는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취하고, 잃고, 누군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또 그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삶. 어떤 목적도 의미도 확실치 않은 쳇바퀴의 삶이다.   


 니체는 삶이 그런 영겁회귀 일지라도 그 삶을 몇 번이고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표면적으로 잘나고 편안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삶의 태도의 문제다. 권태롭거나 고통스러운 삶에 지루해하거나 절망한 채 마지못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고난과 어찌할 수 없음을 버티어내고 극복하는 ‘재미’를 느끼는 삶의 태도다.   


 결혼이야기는 명백히 ‘결혼’을 소재로 하지만, 어떤 삶의 어떤 상황을 대신 넣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누구나 축복하는 찬란한 첫 시작이 아니라, 소멸하고 바로 그 잿더미 안에서 재탄생하는 불사조 같은 삶의 면면들. 어쩌면 그런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 시작은 아주 새로울 것도, 신선할 것도 없다. 너무 달지도 씁쓸하지도 않다. 몇 번이고 다시 먹어볼 만한 감칠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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