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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pr 20. 2020

달리는 이유 (1917)

영화 속 '장면' 돋보기

 영화 전체가 두 개의 긴 테이크로 이어진 영화 1917에선 ‘몰입감’을 논하기도 무색하다. ‘비 몰입’의 상태가 있어야 몰입감을 논할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두 번째 롱테이크 부분에서 몰입이 살짝 깨지는 지점이 있다. 몰입이 깨진 다기보다는, 전율이 일어난다는 표현이 맞겠다. 지금껏 영화가 가져오고 모아 왔던 모든 힘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윌리엄이 멕켄지 대령을 찾아 참호와 평행하게 뛰는 장면이다. 


 1917은 대부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단순히 롱테이크 몇 장면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컷을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도 CG나 촬영기법을 통해 아예 원테이크로 촬영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사령부의 명령을 전하는 윌리엄이 중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부분에서 컷이 분명하게 나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컷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 않게 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65분가량 흐른 뒤다. 그 나머지 45분 역시 원 테이크로 촬영했다. 그리하여 영화는 적어도 보이기에는 단 두 장면으로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몇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는 건 몰라도 롱테이크 촬영을 영화 전반에 걸쳐 극대화한 건 의도가 있어 보인다.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보다 더 사실성을 부여하고 싶을 수도 있고, 더 현장감을 살릴 수도 있다. 특히 전쟁영화에서는 이런 사실성과 현장감이라는 요소가 돋보이기 때문에 롱테이크가 많이 활용되기도 한다. 


 한편 그런 만큼 분명 잃는 것도 있다. 영화 내내 한 공간만 따라가서 다른 이야기나, 인물을 조명할 수 없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입체감도 없고, 이렇다 할 반전도 힘든 구조다. 시간의 흐름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15초 정도의 암전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표현한 것 빼고는 거의 실시간 흐름이다. 영화 전부를 롱테이크로 촬영한다는 건 매체가 활용할 수 있는 '시 공간의 변형'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롱테이크로 촬영을 한 것은 촬영기법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 소재, 암시를 모두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최대한 인물의 시 공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영화에서 나타나는 삶의 접점을 하나씩 이어간다. 그 접점들은 꽃봉오리처럼 차오르다 절정으로 피어난다. 대다수의 관객이 전율을 느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을 장면. 포화 속에서 사령부의 편지를 전달하려 참호에서 나와 참호와 평행하게 달리는 윌리엄의 모습이다.         


 포화 속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시체들. 전쟁은 의미 있던 것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지 모를 만큼 인간의 정신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한다. 전쟁 상황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다만 생존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한다. 동시에 전쟁은 인간에게 허위의식을 제거해주고, 보다 강인하고 냉철하게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해 준다. 갑자기 알몸이 된다면 창피하고 어떤 수단도 없는 것에 대해 당황할 것이다. 당황스러움이 지나가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몸이 어떻게 생긴 지 살피고, 진정으로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비이성적의 극치인 전쟁은 반대로 이성적인 가까은 사유가 나타나게끔 해주기도 한다. ‘그래야만 하는’ 혹은 ‘신의 뜻’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믿음이나 구원이 아닌, 인간 삶 자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기초해 삶을 긍정하는 단단한 생각들이다.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며칠을 싸우고 또 몇 번 주인이 바뀌는 경우는 전쟁. 그 가운데 시체는 쌓이고 쌓인다. 정작 어느 쪽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아무 성과도 없다. 허무의 극치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또 몇십 배로 많은 슬픔과 아픔을 남기면서도 정작 바뀌거나 이뤄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동과 정당화로 인해 이성을 잃고, 흥분과 비이성적인 행동만 남는다. 그런 비참함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사유가 피어난다. 삶과 전쟁은 닮았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삶과 전쟁은 서로 닮았다.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삶에 맞서지만 정작 큰 의미에서 변하는 건 없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목숨값을 치르고 몇 미터 나아갔다가도, 허무하게 빼앗긴다. 삶에서 역시 한 단계 성취했거나 성숙했다 싶으면 곧이어 몇 단계 나락으로 떨어진다. 의식하지 못한 채 태어나고, 어찌할 수 없는 것에 괴로워하다가, 어떤 깨달음을 얻어 성숙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런 인간인 채로 노쇠해 죽는다. 치열하게 살아온 결과가 그러하다. 전쟁도 비슷하다 치열하게 싸우다가 죽는다. 혹은 트라우마를 입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 와중에 모든 걸 감내하고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 삶에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단강을 건너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금빛 동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항상 보호해 주실 겁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윌리엄은 치열한 전투를 앞두고 찬송가를 듣는다. 윌리엄은 아무런 동요도 되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앞선 채다. 반면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죽음 뒤에 안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 전쟁터로 향한다. 포화 속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든다.  


 윌리엄은 동료 병사에게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할 파트너로 지목당했다. 단지 우연이다. 어떤 이유도 없고, 의미도, 목적도 없다. 전시 상황, 혹은 삶의 여러 문제가 그렇듯이. 윌리엄은 훈장이나 메달에 회의적이고, 전쟁을 미화하지도 않는 현실주의자다. 그럼에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임무를 완수하러 간다. 애국심에 고취되어서도, 전쟁에 미쳐서도 아니다. 그저 동료와의 약속과 자신이 믿는 가치 때문이다. 그는 운명을 선택하진 못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과 행동을 해 나간다. 대다수가 어떤 고민 없이, 혹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주는 최면이나, 죽음 앞에서 오는 미칠 듯한 긴장감을 마취제 삼아 적진을 향해 뛸 때, 윌리엄은 편지를 전달하려 평행하게 뛴다. 최면에 걸린 채가 아니라, 자기가 밟는 땅과 날아오는 포탄을 온전히 느끼고 인지하면서. 자신이 가려는 방향과 목적을 뚜렷하게 인지한 채로.

  

 이런 윌리엄의 모습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뛰던 포레스트는 우연히 미식축구 경기장을 가로지른다. ‘가려던 곳을 간 건데, 그게 삶의 기회가 될 줄 몰랐다’ 고 말하는 포레스트의 독백이 이어진다. 삶과 싸우지 않고 삶이 이끄는 대로 가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잃지 않는다. 주어진 삶과 사이 좋게 지내면서도 삶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사령부는 또 명령을 내리겠지, 새벽에 공격하라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맥켄지 대령은 공격명령을 멈추고는 맥 빠지는 말을 한다. 목숨 걸고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전달했는데, 그것 또한 또다시 반복되는 허무의 굴레로 보인다. 혹여 그렇다 할지라도 윌리엄의 행동은, 그의 삶은 허무가 아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지로 강인하게 삶을 헤쳐 나갔다. 대부분의 병사가 참호에서 나와 적진으로 뛸 때, 오로지 본연의 의지와 생각으로 멕켄지 대령에게 향한 그 몸짓. 어떤 역경과 가혹한 운명보다 강인하다. 


 뛰는 건 힘든 게 맞다. 힘들어야 한다. 힘들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차오르는 숨 가쁨 한 모금까지 가늠하며 심호흡으로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피어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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