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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May 10. 2020

사실이라고 함은 (펀치드렁크러브)

영화 속 '물건' 돋보기

한 차량이 전복되고, 몇 바퀴를 무사히(?) 구른 그 차가 오르간 같은 악기를 놓고 간다. 뒤이어 정신을 이상하게 뒤흔드는 듯한 음악과, 강렬히 화면을 비추는 빛이 관객의 신경을 건드린다. 뒤이어 원색의 줄무늬들이 현란하게 변하다가 덩어리로 뭉쳐지고 별로 반짝이는 듯한 회화적인 장면이 말해주는 듯하다. “이 영화는 제정신이 아니야. 적당히 알아들어”


 펀치 드렁크(punch drunk)는 ‘뇌세포 손상증'을 말한다. 정신 불안, 기억상실 치매나 실인증의 만성 증세가 나타나기도 하고 심할 경우 생명을 읽기도 하는 증상이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인 베리 이건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신경을 긁는 음악 불안한 타악기 리듬, 갑자기 밝아지는 화면과 극명한 색조 대비 등을 보여준다. 관객은 아리송해진다. 정신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인 베리도 못 믿겠고,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것 같은 영화의 서술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형 피아노인지 오르간인지 하는 악기는 그나마 확실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통사고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가운데, 레나는 사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잔해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오르간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한다. 마술처럼, 기이하게 나타난 여주인공인 레나의 존재 자체도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녀 역시 오르간의 존재를 인정했고, 회사의 부하직원과 여동생 역시 오르간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안한 주인공, 믿을 수 없는 영화 가운데, 오르간은 그나마 존재의 근거가 탄탄하다.

 

 베리는 도로에 놓여있었던 오르간을 사무실 책상 한가운데 올려놓는다. 망상과 불안 증세가 있는 베리에게 다른 사람이 역시 분명히 인지하는 오르간은 베리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위안과 안정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일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고 간혹 연주도 하거니와 쓰다듬기도 하며 위안을 얻는다. 

 

 오르간과 비슷한 시점에 홀연히 나타난 레나 역시 베리에게나 관객에게나 아리송한 존재다. 동료의 가족사진에서 베리를 보고는 일부러 접근했고, 적극적으로 베리와 친해지려 다가오는 레나. 불안하고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남자 베리에게 일어나기에는 쉽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다. 영화는 뜬금없이 등장한 낡은 오르간 같은 악기, 그리고 역시 갑자기 나타난 레나를 병치해 보여주며, 섣불리 믿을 수 없는 영화에서 ‘믿을 수 있는 것’에 관해 말한다. 


 영화는 소리와 화면, 장면을 통해 지속해서 베리와 관객을 동일시한다. 음악이나 화면과 같은 장치가 없을 때는 장면 자체가 베리의 정신을 건드린다. 7명의 여자 형제와 친척들이 버글거리며 내는 소음과 분위기는 베리를 괴롭히고 역시 관객을 건드린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관객에게 베리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내면화하도록 하고 베리와 동일시하려 한다. 분노조절 장애, 환청, 망상, 강박 등의 크고 작은 정신 장애가 있는 베리는 분명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어쩐지 우리를 닮기도 했다.

 

 베리는 푸딩을 먹지도 않으면서 단지 마일리지를 모으려 푸딩을 마구잡이로 산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부수기도 하고, 망상에 젖어 불안에 떨기도 한다. 어리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는 애착의 표현을 하기보다는 계산하고 돌려 말하고, 애정 관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등 쉽게 가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다. 상대가 하지도 않은 말이나 행동을 추측하며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며 좋아하거나 괴로워하기도 하며, 분노를 비정상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다만 그러지 않은 척하는 것일 뿐. 


 그래서인지 꽤 특별해 보이는 이 인물에 관객은 의외로 쉽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관객 역시 덩달아 ‘믿을 수 없는 영화’에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은연중에 찾아 나서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통해 ‘실재’를 말한다. 베리가 사랑을 얻는 과정은 곧 의심스러운 영화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베리는 멋진 구석이라고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남자다. 베리 스스로 역시 알고 있다. 그런 베리가 스스로의 결점을 타인에게 말하고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레나를 만난 후부터다. 그 과정은 마치 오프닝 시퀀스에서 길가에 놓인 오르간을 들고 최선을 다해 뛰는 장면과 겹쳐진다. ‘힘껏’ 하는 점에서다. 몸은 고되지만, 정신적으로 고양된 채로, 감내함으로써 불분명했던 것들은 현실로 다가온다.   

 

 베리는 오르간이 실존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들고뛰어 사무실에 놓고, 종종 건들거나 연주하며 위안을 얻는다. 레나를 향해 고백하러 갈 때도 오르간을 들고 뛰어간다. 영화에서 ‘오르간’은 베리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물건이자 유일하게 실존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처음에는 타인의 인정이었지만 베리의 시선과 동일시되면서부터는 베리가 지속적으로 연주를 하거나 감싸 쥐는 장면을 보면서 ‘실존’한다고 여겨지는 물건이다. 레나도 마찬가지다. 레나는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한 베리의 시선이나 영화의 서술을 따라가면 그 존재 자체도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레나를 정말 ‘실재’로 만드는 것 역시 베리다. 


 “정신과 의사 불러 달란 적 없어요. 저 푸딩도 제 것이 아니고요. 양복은 오늘 아침 미팅 때문에 입었고, 난 울지도 않아요.” 


 처음에 레나가 저녁식사를 청하자 베리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자신을 똑바로 보고 고치려는 에너지를 내는 대신, 그저 그녀에게 보이고 싶은 ‘정상적인’ 모습을 열거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리는 그녀에게 하나씩 진실을 말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내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좋아하는 디제이가 있는데, 난 그가 거짓이 없어서 좋아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베리는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푸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며, 그녀와 한층 가까워진다. 자신의 결점을 힘들게 말함으로써 신비로운 그녀는 베리의 현실로 한 발짝 들어온다. 


 악덕 폰팅업체에 대한 태도도 변한다. 좋아하는 레나에게 위해가 가해지자 처음에 피하고 당해만 왔던 베리가 적극적으로 찾아내 문제를 해결한다. 하수인들을 처리하고 보스에게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또한 레나에게 그간 있었던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끝까지 푸딩 마일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폰팅과 그간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문제를 회피하려는 베리가 고양된 채 스스로를 변화시킨 다. 그 지점에서 신비롭게 등장한 레나는 실재가 된다. 원래 실재인지 앞으로도 실재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주체를 움직이고 고양되게 하는 것. 그것은 설령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해당 주체에게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없는 것이 된다. 어떤 개연성도 없이, 신비롭게 등장한 오르간, 그리고 레나가 실재하게 되는 것은, 개연성이나 당위성이 아니라, 베리의 적극성과 힘에 의해서다. 영화 내내 베리와 동일시된 우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의심스러운 세상에서 확실한 건 그 자체가 정말 수많은 근거 덕분에 실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의 독자적인 관계 속에서, 실재한다는 에너지를 얻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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