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nd May 22. 2020

불만 중독 (부기 나이트)

영화 속 ‘장면’ 돋보기

# 리무진 1

포르노에 가까운 성인영화를 만들면서 ‘예술’을 한다고 믿는 영화감독 잭 호너는 자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상을 찍는다. 리무진에 지나가는 일반인 남자를 태우고 성인 영화배우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트럭 1

한 때는 성인영화에서 잘 나가는 배우였던 더크 디글러는 지나가는 낯선 차에 탄다. 성인영화에 배우로 데뷔하면서 반짝 스타, 더크 디글러가 되기 전 에디 아담스로 돌아간다. 유난히 큰 물건을 보여주거나 자위하는 것을 보여주며 용돈을 벌던 때다. 


# 리무진 2

리무진에 학생이 탄다. 롤러걸을 알아본다. 학교를 중퇴하고 성인영화배우로 데뷔한 롤러걸에게 과거는 지우고 싶은 흔적이다. 


#트럭 2

에디 아담스를 태운 남자는 더크 디글러를 못 알아본다. 에디에게 더크 디글러 때는 돌아가고 싶은, 누군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때다. 


# 리무진 3

“조금 더 섹시하게” 잭 호너는 남자가 카메라를 등지고 섹스를 하자 주문한다. 조금 더 부드럽고, 섹시하게, 상대를 존중하고 부드럽게 하라고’ 흥분한 남자가 감독의 말을 듣지 못하자 촬영을 중단한다. 달아오르는 남자의 행동도 중단된다. 컷 

“당신 작품도 한물갔어.” 행위를 중단하게 하고 흥분한 남자를 내리게 하자 남자가 내리면서 말한다. 잭 호너는 폭발한다. 그러고는 남자를 치기 시작한다. 


#트럭 3

“이런 짓으로 먹고살다니 호모 자식” 에디가 발기하지 못해 자위를 못하겠다고 하자 차에 태운 남자가 에디를 치기 시작한다. 뒤이어 차를 따라온 트럭이 멈추고, 에디에게 린치를 가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위하는 것을 팔던 에디와 차에서 섹스를 하려던 남자가 맞는 장면이 연달아 교차된다. 교차되는 장면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맞고 때리는 주체가 묘하게 섞인다. 잭이 때리고 에디가 맞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에디와 같이 있던 남자가 리무진에 탄 남자를 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는 같은 성인영화를 찍던 배우와 감독. 지금은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맞고 때리는 오묘한 몽타주가 이어진다. 


이 장면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각적으로 매우 잔인하기 때문은 아니다. 본질 자체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본질에 대한 위협 때문이다. 


에디는 유독 큰 물건을 타고났다. 자연스럽게 섹스가 특기가 됐다. 다른 부분에서 내세울 것은 없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것도, 다른 분야를 공부할 수 있는 여유도 되지 않았고,  우연히 기회가 주어진 것도 아니다. ‘성인영화배우’는 에디의 삶에서 불가결한 요소이자 최선의 선택지로 보인다. 성인 영화배우를 하게 된 것도, 성기와 자위를 하는 것을 보여주며 용돈을 버는 것도 에디의 삶. 에디라는 존재의 연장이다. 


에디라는 존재의 행동은 에디라는 존재의 본질과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짓으로 먹고살다니’라는 말은 행동에 대한 타박을 넘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떳떳하지 못한 일인 것은 분명 하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말이다. ‘삶답게 살아라’ 모든 주체의 행동은 결국 삶의 연장이라고 볼 때 이와 같은 말은 존재에 대한 폭력에 가깝다. 그 말은 주체를 향하지만 관객은 주체를 배제한 타자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폭력적이다.  


리무진에 탄 남자도 마찬가지다. 뜬금없이 차에 태워 흥분하게 하고, 섹스를 조금 더 섹시하게, 매력적으로 하라는 것. 달아오르는 때 행위를 중단하고 위치나 태도를 주문하는 것. 행위의 주체 그리고 행동의 본질에 다가서기보다는 카메라 너머 관객과 감독의 자기만족이 앞선 주체라는 본질에 대한 폭력이다.

섹스의 본질은 번식이다. 과정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쾌락은 번식을 하게끔 하는 동력에 가깝다. 섹스를 보다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쾌락과 흥분을 이끌어 내는 것. 그마저도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전시하는 것은 모든 존재, 그리고 주체가 가지는 공통 속성인 ‘본질’에 대한 폭력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본질에 대한 폭력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만성적으로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멋있게 살아라. ~답게 살아라.’ 잘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게 ‘어떠하게 살아라’ 하는 명령은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의 균열을 초래하는 말이자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일상적인 잔소리뿐 아니라 사회의 전반이 추구하는 가치, 제도 역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불만족에 차게 한다. 문제는 외부에 의해서 뿐 아니라, 주체 역시 타자와 외부의 가치를 내면화하여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특성.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고, 진보를 믿는 특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식한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인 즉자의 시선 외에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미래라는 개념과 진보라는 생각은 좋게 말하면 ‘희망’, 그 이면에 ‘불만족’이라는 생각이 만성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성취와 동시에 찾아오는 잠깐의 만족. 그리고 이어지는 만성적인 불만족.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부풀려 잉여를 창출에 내려는 세태가 존재에 내면화된 결과다. 수많은 타자에 시선에 맞춰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는 것과 강요된 불만족 문화에 의해 주체들은 평생 스스로를 부정하며 허상에 가까운 ‘최선의 상태’를 찾아 헤맨다.  


불만 중독과 불안증 독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부정뿐 아니라 세계를 부정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인 ‘유토피아’인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추구하고, '피안과 차안', '현실과 천국'을 구별해 각자가 믿는 종교에서 약속하는 곳을 꿈꾼다. 그 마저도 존재가 소멸된 이후다.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돼."


한 프로그램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이효리가 한 말이다. 동심 파괴나 팩폭이 아니다. 그보다는 뭐가 되든 그 존재를 응원한다는, 존재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방어막이다.


침묵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이미 그 자체로 되어있고 존재하는 개체에게 ‘~가 돼’라는 발화 자체 역시 존재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 무관심의 침묵이 아니라 애정과 관심이 가득 찬 가운데 존재와 그 의 현재 삶 자체를 응원하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일 때 비로소 존재는 존재하게 되고, 존재에 가해지는 만성적인 폭력은 사그라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실이라고 함은 (펀치드렁크러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